검은 날개의 둥지 (9)

의지

by 이샤라

그 순간, 무언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오미누스가 다급히 속삭였다.


"빛을 꺼."


단번에 뜻을 알아차린 시즈가 손끝에서 흘러나오던 광휘를 꺼뜨리자, 어둠이 방 안을 집어삼켰다. 숨소리를 삼킨 채 몸을 낮춰 나가려 했지만 이미 통로 입구는 검은 그림자에 가득 메워지고 있었기에 시즈는 이능을 발휘해 두 사람의 몸을 감췄다. 어둠은 무겁게 가라앉았고, 바위 바닥을 긁는 발톱 소리가 천천히 다가오자 심장 고동은 귀를 울릴 만큼 커져 고요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발걸음 소리의 주인이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칠흑빛 부리와 두툼한 어깨, 몸을 감싼 암녹빛 로브는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위압감을 드러냈다. 그림자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천천히 곳곳을 훑기 시작했다. 벽을 따라 스민 먼지의 결이 어딘가 미묘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숨결 같은 잔향이 공기 속에 얹혀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일지. 원래의 자리에서 어긋나 있던 그 책을 바라본 시선이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길게 찢어진 세로 동공을 가진 눈으로 돌변하였다.


"쥐새끼들이 숨어들었구나."


공간을 짓누르는 저음과 함께, 베리엘의 손등에서 서슬 퍼런 클로가 섬뜩한 파열음을 내며 튀어나왔다.


콰아앙———


거대한 팔이 공기를 찢어발기는 순간, 번개처럼 무자비한 일격이 방의 한쪽 구석을 강타했다. 그 살기를 찰나의 순간 읽어낸 오미누스는 재빠르게 시즈를 낚아채듯 붙잡고 몸을 날렸다. 날 선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며 단단한 바위벽을 두부처럼 썰어버리자 두 사람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쏜살같이 통로 밖으로 몸을 던졌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도망치는 뒷모습을 향해 포효가 뒤따랐다. 베리엘이 천장 언저리의 레버를 거칠게 잡아당기는 순간, 마르프록스 산맥을 덮은 두터운 구름 위로 암녹빛 빛줄기가 번져나갔다. 산맥을 뻗어 흐르는 그 빛줄기는 산맥 일대를 감싸는 거대한 문양을 새겼고, 그 문양은 하늘을 가르듯 빛을 뿜어냈다.


정신을 붙들 겨를도 없이 통로 밖으로 튀어나온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양옆의 가파른 절벽과 아래에서 몰려드는 익인들의 무리였다.


"어떡하죠? 올라왔던 길목이...!"


시즈가 당황스레 목소리를 높였지만 오미누스는 이미 빠르게 주위를 훑고 있었다. 퇴로는 없었고, 위로 이어진 좁은 계단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시즈의 팔을 붙잡아 단숨에 등에 올려 메더니 쏜살같이 계단을 치고 올라갔다.


"꺄악—!"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즈의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계단과 바위벽이 눈앞에서 휘몰아치듯 스쳐 지나갔고, 막힌 숨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때에야 오미누스는 그녀를 내려놓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던 시즈는 결국 당황과 감사, 화가 뒤섞인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다음부터는... 미리 말이라도 좀 해주세요!"


말끝은 떨렸지만 시선에는 분명한 항의가 실려 있었다. 오미누스는 잠시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여느 때처럼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변함없는 짧고 무성의한 답에 시즈는 또 한 번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일 틈도 잠시, 아래쪽에서 익인들의 외침이 차갑게 울려 퍼졌다.


"저기다! 인간들을 놓치지 마라!"


바위를 찍어내리는 발톱 소리가 돌계단을 울리며 거세게 쫓아 올랐다. 그 순간, 시즈의 시선이 옆 바위벽에 열린 틈으로 향했다. 산맥의 내부로 이어진 듯한 그 입구는 바람이 빨려들 듯 요동치며 안쪽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저쪽에 길이 있어요!"


시즈의 외침과 함께 두 사람은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몰려드는 기척을 뒤로한 채 요동치는 바람을 가르며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여전히 목발에 몸을 의지한 아로스는 소년이 내려온 길목을 따라 끈질기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돌부리와 독기를 머금은 바람이 사방에서 덮쳐왔지만 진정한 무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데서 스며들고 있었다. 산 위로 갈수록 알 수 없는 기운이 짙어졌고, 그것이 몸 안에 깃든 엘나의 힘을 잠식하듯 옥죄며 약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자조가 목구멍 언저리에서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때마다 시즈의 얼굴이 의지를 일으켰다. 아우로라에서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겨우 작은 이능을 다루는 평범한 견습 무녀였던 그녀는 어떠한 순간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모하다 할 만큼 정면으로 마주했고, 결코 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 올곧은 뒷모습을 수없이 곁에서 지켜보았던 아로스는 지금 자신의 주저함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깨달으며 이를 악물고 무거운 발걸음을 들어 올렸다.


한 발, 또 한 발. 그렇게 쓰러질 듯 흔들리면서도 다시 산을 향해 나아가던 중, 뒤에서 가쁘게 몰아쉬는 숨결과 함께 누군가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형씨! 형씨이이!"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벨라미였다. 비탈길 위로 헐떡이며 쫓아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거세졌고, 간신히 아로스를 따라잡은 벨라미는 고개를 숙여 무릎을 부여잡은 채 거친 숨을 고르려 애썼다.


"아니, 목발 짚고도 뭐 이렇게 걸음이 빠른 거야? 사람 잡겠네."


기가 막힘이 담긴 투덜대는 물음에 아로스는 등 뒤를 돌아보며 벨라미를 향해 낮게 물었다.


"...여긴 또 왜 따라온 거지."


숨을 고르던 벨라미가 비죽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꼴로 혼자 산에 기어오르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 가만있어? 나도 감옥에 갇혔던 몸인데, 구조가 대충 머리에 남아 있거든. 그거 알려주려고 따라온 거야."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게다가... 형씨, 지금 그 감옥에 갇힌 사람들 구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안 그래?"


그 말에 아로스는 다시 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숨과 함께 담담히 대답을 내뱉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형씨도 참, 늘 그렇게 무덤덤하다니까. 말 주변 없다는 소리 꽤나 들었겠어."


벨라미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아로스의 뒤를 따라나섰고, 두 사람의 그림자는 거친 바람과 함께 다시 산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산허리를 따라 함께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던 와중, 벨라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근데, 아까 혼잣말로 중얼댔던 사람은 누구야?"


아로스는 대답 없이 목발을 짚으며 산을 올랐다.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만이 잠시 둘 사이를 메웠지만, 그는 잠깐의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준 사람. 내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기도 하지."


"그래서 누구냐니까?"


벨라미가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자 아로스는 더는 말을 잇지 않은 채 묵묵히 발걸음을 이어갔다. 침묵이 길어지자 벨라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누구길래 말을 안 해주는 거야? 스승? 친구? 아니면..."


그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숨겨놓은 아리따운 숙녀?"


그 순간 아로스의 눈매가 번뜩이며 날카롭게 벨라미를 노려보았다. 칼끝처럼 직설적인 시선에 벨라미가 흠칫 어깨를 움찔했다.


"왜, 왜 그래? 정곡이라도 찔리셨나?"


잠깐동안 벨라미를 노려보던 아로스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런 사이는 아니다."


재미없는 답변에 벨라미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슬쩍 시선을 돌렸고, 바람에 흩날린 웃음을 애써 감추듯 헛기침을 흘렸다.


"기왕 말 꺼낸 거, 궁금하게 만들지 말고 제대로 좀 알려줘 봐. 그분은 대체 뭐 하는 분인데?"


잠시 망설이던 아로스는 낮게 대답을 흘렸다.


"...무녀님이시다."


"무녀?"


벨라미가 눈을 크게 떴다.


"아우로라의 무녀? 어쩌다 그런 대단한 분이랑 알게 된 거야?"


물음은 호기심 반, 장난기 반으로 흘러나왔다. 아로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앞만 바라봤으나 계속 이어지는 벨라미의 재촉에 결국 짧게 입을 열었다.


"...엘라리모스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안식교회에 내려온 언령을 시작으로, 함께 여정을 떠났지."


"오, 그렇구만. 그래서, 지금 무녀님은 어디 계셔?"


그 순간 아로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고개를 들어 올린 시선은 어둡게 흔들렸다.


"...나도 모른다."


짧은 대답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무게를 인지했는지, 벨라미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아로스를 바라봤다.


"그래...? 뭐... 그래도 어딘가에 잘 계시겠지. 그런 분이라면 말이야."


바람결에 실린 그 말투는 대수롭지 않아 보였으나 은근히 달래는 기색이 배어 있었고, 그 뒤로 뜻밖에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산을 올랐다. 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험준하게 치솟은 절벽의 양옆은 날카롭게 갈라져 있었고, 일부 발밑의 길은 비좁은 틈새로 이어지며 한 걸음만 삐끗해도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바람결에 실려온 독기는 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독해지는지 길목마다 보랏빛으로 물든 메마른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서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는 발걸음 속에서 벨라미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가 삼켰다. 어깨를 움찔하며 무슨 농담이라도 꺼내려는 듯했지만, 아까 아로스가 보였던 날 선 기색 때문인지 억지로 말을 참는 모양새였다.


"감옥은... 어떤 곳이었지."


아로스가 불쑥 입을 열자 눈을 반짝인 벨라미는 기다렸다는 듯 숨을 고르지도 않고 말이 쏟아졌다.


"산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지. 층이 여러 겹으로 나뉘어 있고, 밑바닥에는 노예들이 죄다 몰려 있었어. 방마다 사람들을 꾸역꾸역 쑤셔 넣어놔서 제대로 숨도 못 쉴 지경이었지. 위쪽으로는 감시하는 놈들이 들락거렸고."


그는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찡그렸다.


"밥이라고 주는 건... 죽인지 뭔지 모를 맛대가리 없는 맹탕 아니면 구더기 득실거리는 빵.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았다니까."


벨라미는 뭔가를 떠올리려는 듯 곰곰이 생각하다가 낮게 툭 던졌다.


"아, 그리고 인간들을 노예로 데려간 이유가 아마... 뭔가를 만들기 위해서라던데. 뭔지는 몰라도 죄다 그걸 위해 끌려간 거겠지."


"그럼, 넌 어쩌다 감옥에 끌려간 거지?"


아로스의 물음에, 벨라미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갑자기 얼굴이 더욱 환해지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거 말이야? 이 산 반대편에 바닷가가 있는데, 거기 마을이 예전부터 럼주로 유명했거든. 그 맛을 보려고 간 건데, 웬걸? 수인들한테 덜미 잡혀서 그대로 감옥으로 끌려간 거지. 에휴, 술은 죄가 없는데 내가 괜히 화를 당했다니까."


술 얘기가 나오는 순간 쾌락으로 가득 찬 시선과 함께 손짓 발짓이 커진 벨라미는 혀를 차며 감탄을 늘어놓았다.


"술이라는 건 말이야, 맛보다 향으로 먼저 즐기는 거야. 코끝에 맴도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지. 깊게 들이마시면 눈을 감아도 세상이 환해지는 기분이라고. 내가 그동안 돌아다니면서 별별 술 향을 다 맡아봤거든? 저 멀리 대륙에서 들여온 고급 와인의 그윽한 과실 향, 오랜 시간 오크통 속에서 잠자던 위스키의 짙은 나무 향, 심지어 코를 톡 쏘는 싸구려 증류주의 거친 향기까지... 종류는 상관없어. 모든 술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긴 향이 있으니까."


말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벨라미는 마치 술잔을 손에 들고 있는 듯 손끝까지 들썩이며 허공에 흔들어 보였다. 눈빛에는 진심 어린 기쁨이 담겨 있었고, 그 웃음은 취하지 않았음에도 취기가 도는 듯 환했다.


"그 향에 담긴 이야기를 음미하고 딱 한 모금 머금으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달라 보인다니까. 햐, 상상만 해도 코끝에 그 향이 맴도는—"


"그래서, 수인들이 왜 인간들을 잡아다 감옥에 집어넣는 거지?"


아로스가 단호하게 말을 끓으며 묻자, 벨라미는 당황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 술 얘기하는데 그걸 딱 끊어버리네!? 흥, 정 없긴."


투덜거리는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묻어났지만, 곧 한숨 섞인 목소리와 함께 대답이 이어졌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형씨도 알잖아? 수인들이 수천 년 동안 어떻게 핍박당했는지. 그걸 생각하면 인간들 좀 잡아다 부려먹는 게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아?"


벨라미의 말은 끝내 씁쓸하게 흘러나왔지만, 그 어투에는 여전히 조금 전 술 이야기를 방해받은 아쉬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서자 뒤따르던 아로스 역시 목발을 멈추며 시선을 올렸다. 앞에는 가파른 절벽이 길을 막아 서 있었고, 그 중앙을 따라 사선으로 길게 갈라진 틈새가 입을 벌린 듯 드러나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는 단순히 바위가 갈라진 흔적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아로스의 눈매가 서서히 좁혀졌다.


겉으로는 평범한 절벽으로 보였지만 허공을 스치는 산의 기운은 뭔가 불길했다. 마치 산맥 자체가 신음이라도 토해내듯, 아까부터 느껴진 불안정한 숨결이 저 바위 깊숙한 곳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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