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마주하는 발걸음 (8)

병자의 마을

by 이샤라

그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시즈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괜찮을 거야.'


스스로에게 되뇌는 주문처럼, 그녀의 내면에서부터 희미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푸른빛을 띠던 눈동자가 부드럽게 흔들리더니 금세 짙은 갈색으로 스며들 듯 변해갔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최소한의 위장이었다.


"누구냐. 어디서 왔는지, 출신과 목적을 밝혀라."


병사 중 하나가 창끝을 겨누며 말을 던졌다. 다른 한 명은 이미 허리춤의 칼자루를 감싸고 있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은 수상쩍은 낌새가 감지되면 곧바로 칼을 빼들 태세였다. 긴장감으로 가득한 병사들의 매서운 시선은 두 사람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이 마을이 외부인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경계심 어린 태도에서부터 명백히 드러나고 있었다.


시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떠돌이 사제입니다. 옆에 계신 분은 제 호위기사님이시죠. 안식 교회의 마르크님께서 이 마을을 알려주셨기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시즈는 말끝을 조심스레 다듬은 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스스로의 본래 신분과 아로스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언급을 피했다. 이 낯선 마을이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는 지금 불필요한 진실은 감추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교회의 증표를 꺼내 보였다. 증표에 새겨진 신의 가면 문양이 빛에 반사되어 미묘한 광을 내비쳤고, 병사들은 그 문양을 유심히 확인한 뒤 서로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제야 경계가 조금 누그러졌다.


"들어가도 좋다. 하지만, 마을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바로 쫓아낼 것이다."


병사 중 한 명이 낮게 경고하듯 말하며 몸을 비켜 길을 열었다. 날 선 긴장은 아직 걷히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제지는 없었다. 그제야 시즈는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병사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말을 몰아 마을 외곽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맑은 물이 넘실대는 우물이었다. 그 곁에는 두레박이 나무 기둥에 걸려 있었고, 우물가 옆 작은 물레방아가 느릿하게 돌아가면서 근처에 방앗간이 있음을 알리는 듯했다.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손바닥만 한 텃밭에는 몇몇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고개를 숙인 채 채소를 따거나 뿌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 마을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향한 주민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조용한 움직임 속에서도 처음 보는 이들을 향한 경계와 불신이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시즈는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놓이는 듯했다. 너무도 오랜만에 마주한 '정상적인' 마을. 그 평범함이 잠시나마 그녀에게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추적자들의 광기도, 부패의 공포도 없는,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 이토록 당연한 풍경이 이다지도 귀하게 느껴지려는 찰나, 갑작스러운 불쾌한 악취가 코끝을 찔렀다.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공기 속에 섞인 피비린내와 무언가를 불태운 향이 기이할 정도로 짙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 사이로 들리는 고통의 신음과 비명이 고막을 파고들면서 "들것을 가져와!"라며 소리치는 다급한 외침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렇게 마을 중심부에 다다른 순간, 두 사람은 그곳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광경은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수많은 환자와 부상자들이 병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뀐듯한 마을의 비어 있는 집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남은 이들조차 마땅한 자리가 없어 바닥에 펼쳐진 리넨 자루 위에 몸을 뉘고 신음을 토해냈다. 누군가는 의자에 겨우 앉아 있었고, 누군가는 풀썩 쓰러진 채 들것 위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의사들은 분주히 오가고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엔 지친 기색과 체념이 겹겹이 드리워 있었다. 의사는 많아야 열 명 남짓. 그러나 그 숫자는 눈앞의 환자들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피로 얼룩져 있는 하얀 가운에는 군데군데 불에 그을린 흔적이 가득했다. 환자들의 상태는 차마 눈을 뜨고 보기조차 힘들었다. 사지가 잘려나간 이들, 전신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이들, 짐승에게 뜯긴 듯한 깊은 상처를 지닌 이들, 그리고 내장이 검보라색으로 물들어 바깥으로 흘러나온 이들까지. 시즈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비릿한 피 냄새와 살이 썩는 악취, 약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여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시즈와 아로스가 넋을 놓고 서 있던 그때, 어딘가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지에서 오신 분들이군요. 지금은 다들 바빠서 손님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말을 건넨 이는 덩치 큰 사내였다. 짙게 그을린 피부와 건장하고 살집 있는 체격, 그리고 이국적인 외모. 남자의 목소리는 깊고 차분했지만 낯선 억양은 그가 마을 사람들과는 어딘가 다른 배경을 지녔음을 느끼게 했다. 시즈는 순간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아로스와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마을 뒤편에서 들려오는 신음과 비명은 그 발걸음을 놓아주지 않았다. 멀어질수록 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귓가에서는 여전히 메아리처럼 울렸다. 시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하며,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그것뿐이라는 사실이 뼈아프게 느껴졌다.


세 사람은 작은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여관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정갈하게 정돈된 실내에서는 소박한 따스함이 느껴졌다.


"저는 바다 건너 음양의 땅에서 온 '헌'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에서 주민들과 병사분들, 그리고 종군의사분들을 도우며 지내고 있죠."


헌은 투박한 인상과 달리 손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시즈와 아로스를 위해 직접 차를 끓이고, 두 사람이 타고 온 말들을 살피며 안전히 묶어두는 일까지 그의 손끝에서 척척 처리됐다. 문틈으로 보이는 장작더미와 도끼는 얼마 전까지 나무를 패던 흔적처럼 보였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던 시즈는 여전히 마을 중심부에서 들었던 비명과 신음소리를 쉽게 지우지 못했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상처의 잔상들이 끝내 입을 열게 했다.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요?"


걱정이 서려 있는 시즈의 질문에, 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은 본래, 시스테나 전선에서 전투불능이 된 사람들이 안정을 취하기 위해 머물던 외딴 마을이었습니다. 원래 치료는 전선 후방에 있던 시스테나 교회에서 이루어졌지만, 5년 전 교회가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곳을 지키셨던 무녀님이 실종되면서 교회는 더 이상 정화되지 못한 채 방치됐죠. 결국 병자들을 수용하기가 힘들어지면서 이곳으로 사람들을 옮겨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그때 이 마을로 함께 내려오게 된 겁니다."


시즈는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어느새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헌의 말은 며칠 전에 겪은 일을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자신을 인신매매 하려 했던 마을을 시작으로 안식 교회까지 이어진 추적자들의 습격, 그리고 전선에서 사라진 또 다른 무녀. 대체 그들은 무엇을 꾸미고 있기에 무녀를 잡으려 추적자들까지 보내는 걸까?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을 맞춰보려 애썼지만, 아직은 어디서부터 연결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를 무는 와중에, 시즈는 문득 지금 이 마을 환자들의 상태가 떠올랐다.


"환자 분들은... 치료가 가능한 상황인가요?"


시즈의 목소리에는 근심걱정이 가득했다. 마을 중심부를 지나며 들었던 비명은 여전히 귓가를 떠나지 않았고, 귓속 어딘가에서 끈질기게 맴돌았다. 헌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온 환자들 중 절반 이상은 대부분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후송 거리도 너무 멀고, 애초에 부패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하죠. 의사분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끝까지 붙잡아보는 것뿐입니다만... 살아난다고 해도 대부분은 평생을 반신불수로 살아가야 할 겁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의수나 의족조차 구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헌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대화 사이로 흘러나오는 체념은 너무도 생생했다. 헌이 들려주는 설명은 냉정한 현실 때문인지 더욱 잔혹하게 들려왔다.


"또한, 지금 이 마을은 치료소이자 격리소이기도 합니다. 부패병은 감염률이 높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들을 따로 분리해서 수용하고 있죠."


"그렇다면... 아직 전염이 진행 중이라는 말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다행히 이곳 의사분들은 불을 다룰 줄 아십니다. 덕분에 2차 감염의 위험 없이 사망자를 소각하거나 감염자를 격리하며 마을을 유지해 왔습니다."


"부패에 노출된 이들은... 어떤 증상을 보이나요? 치료할 방법은 정말 없는 건가요?"


"명확한 치료법은 없습니다. 부패가 시작되면 피부가 검보라색으로 변해가며 문드러지고, 이내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이성을 잃습니다. 그래서 손을 쓴다면... 아주 작은 상처일 경우에는 더 크게 퍼지기 전에 불로 지집니다. 그 정도가 심하면 아예 절단해야 하죠."


헌은 말을 멈추고 잠시 시선을 멀리 두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사지가 잘린 채 실려 온 환자들은 여기까지 살아서 도착한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편입니다."


"운이... 좋은 편이라고요?"


시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헌은 짧게, 아주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급소나 주요 장기부터 부패가 시작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잘라낼 수도, 멈출 수도 없죠.


잠시 말을 잃은 시즈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여관 문 바깥쪽으로 돌렸다. 얇은 나무벽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신음 소리는 단순한 고통의 소리가 아니었다. 몸이 부서지고, 정신이 무너지고, 삶이 파괴되어 가는 소리. 사지가 잘린 이들이 운이 좋은 편이라면 그보다 더한 이들의 운명은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헌의 손가락이 여관 창문 밖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를 가리켰다. 정황상, 그 연기는 사망자들과 부패의 잔해를 태우는 연기임이 분명했다.


"그 외에는... 부패된 땅 자체에 오래 머무르거나 파도들이 내뿜는 장기에 노출된 경우가 있습니다. 직접 접촉한 것처럼 급속도로 몸이 썩진 않지만, 내부 장기들이 오염되면서 서서히 기능을 잃습니다."


"어떤 증상들이 나타나나요?"


"처음에는 기침, 열, 오한과 같은 가벼운 증상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됩니다. 누군가는 숨을 쉴 때마다 통증을 호소하고, 어떤 이는 소화 기능이 멈춰 아무것도 먹지 못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피를 토하고, 결국엔 온몸이 연보랏빛으로 물들며 천천히 굳어갑니다. 길어야 석 달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차라리 죽음을 목도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잔혹합니다"


헌은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스쳐 지나갔고,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밖에서 문이 삐걱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여기 있나?"


헌은 놀란 듯 고개를 번쩍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당황한 눈빛이 스치더니, 이내 여관 밖으로 다급하게 나갔다.


"아니, 여기는 왜 왔는데? 내가 쉬고 있으라고 말 안 했나?"


열린 문틈 사이로, 여인의 모습이 어슴푸레 드러났다. 조심스레 문턱을 넘은 그녀는 안쪽을 힐끗 들여다보기 위해 얼굴을 살짝 비췄다.


"어머, 손님이 계셨구나. 미안타. 내 나가 있을게."


여인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듯 짧게 말하고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시즈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저분도 격리 대상인가요?"


짧은 질문 안에는 억지로 캐묻지 않는 배려와 어느 정도 감지한 직감이 깃들어 있었다. 시즈의 말에 헌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초기 증상이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저와 의사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접근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는 중입니다."


"귀공, 저분이 이곳에 들어와도 괜찮으신가요?"


시즈가 고개를 돌려 아로스를 바라보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괜찮으니 들어오세요."


헌과 여인은 천천히 문턱을 넘었다. 여인은 마치 자신이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 듯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무게가 실린 움직임에는 걷는 동안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 분명했다. 헌은 그녀의 팔을 받쳐 부드럽게 부축하며 시즈와 아로스의 반대편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이쪽은 제 아내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미사라고 해요."


미사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부부간의 대화 속에서 그녀의 말투는 헌과 닮아 있었지만 인상은 이곳 현지인 특유의 결이 스며 있었다. 피로에 눌린 얼굴 한켠에는 언젠가 빛을 품었을 아름다움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것은 무너진 표정 속에서도 은근히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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