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날개의 둥지 (12)

불꽃의 사제

by 이샤라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대검이 밀려났고, 오미누스의 발끝이 뒤로 미끄러졌다. 부서진 돌계단 위에서 그의 작은 체구가 균형을 잃고 밀려나가자 시즈는 피가 마르는 듯 숨을 삼켰다.


'저대로라면 버티기 어려워...!'


시즈의 입술이 새파랗게 떨렸다. 그러나 곧 라사리아의 말이 기억 저편에서 아른거렸다. 힘의 대가는 몸에 고스란히 쌓여 가되, 고통을 잊고 이능을 다룰 수 있게 해주는 그의 힘.


잠시 후, 왼쪽 눈이 푸른빛으로 타오르더니 숨결마저 날카롭게 갈라졌다. 막을 지탱하던 손끝에서 폭풍 같은 힘이 분출됐고, 작업장을 뒤덮는 압력이 사방으로 퍼졌다.


"쿠오오오오아아아아아아아――――――!!"


단순한 마력의 발현이 아니었다. 공기를 가르고 퍼지는 울림은 마치 고룡 아텐시아가 토해낸 포효와도 같았다. 바위가 진동하며 먼지가 바람처럼 흩날렸고, 공간 전체가 무너질 듯 절벽에 커다란 금이 갔으며, 귀를 찢는 듯한 공명에 사제들의 몸이 일제히 휘청거렸다.


"―――!"


붉은 불꽃을 품었던 그들의 눈동자가 한순간에 흔들리며 꺼졌다. 마치 머릿속을 직격으로 가격 당한 둣, 사제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의지가 꺾여버리며 제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압도적인 폭발음과 함께 터져나간 광경에 오미누스조차 순간 눈길을 멈췄다. 베리엘 역시 믿기지 않는 듯 경악의 눈빛을 흘렸다. 단숨에 공간을 잠식한 그 위력은 인간의 이능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거대하고, 신의 권능처럼 원초적이었다.


그러나 그 힘의 반동은 시즈의 몸을 놓아주지 않았다. 거친 숨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발끝이 휘청거리며 균형이 무너졌다.


"헉...... 허억......"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몸속 어딘가가 부서져 가는 감각이 밀려왔다. 하지만 쓰러져 가는 사제들 속에서 단 한 명만이 끝내 무릎을 꿇지 않았다. 숨을 고르며 간신히 버티던 그녀가 시선을 들어 올린 순간, 높은 절벽 끝자락에서 붉은 불꽃을 손아귀에 쥔 그림자가 연기 속에 우뚝 드러났다.


"...아우로라의 무녀가 이 정도로 강했던가."


짧게 내뱉은 음성과 함께, 그림자가 잔해 위로 뛰어내리며 광장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까마귀 형상의 가면 너머로 새어 나온 붉은 안광이 어둠을 가르듯 시즈를 꿰뚫었다. 사제의 몸을 감싼 낡고 해진 로브는 이미 불길과 오래 함께 살아온 자처럼 검붉게 그을려 있었다. 곳곳에 덧입혀진 그 흔적은 마치 불길 자체가 그의 살에 각인된 낙인 같았다. 허리춤에는 다수의 유리병이 매달려 있었고, 그 속에서는 작은 불씨들이 끓어오르듯 꿈틀거리며 형태를 바꿨다. 그것은 단순한 화염이 아닌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미세한 숨결을 내쉬는 불씨였다.


곧 그의 오른손에서 검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길은 고요한 듯 번지다가도 갑자기 요동치며 일렁였고, 이내 그의 등 뒤에서 길게 매고 있던 지팡이가 붉게 빛을 토했다. 끝에 박힌 원석이 불길을 빨아들이듯 타오르자 손바닥의 불꽃은 순간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격렬한 파문을 일으켰으며, 검붉은 오오라가 팔을 타고 흘러내려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구로 응집되었다.


사제는 거침없이 그 화염구를 던졌다. 폭탄 같은 불길이 연달아 날아오자 시즈는 온몸을 굳히며 방어막을 펼쳤다.


콰아앙―――


불꽃이 보호막과 충돌하는 순간, 타는 열기와 충격파가 사방으로 폭발했다. 광장의 바닥이 흔들리고, 그을음 낀 바람이 뒤엉켜 시야를 가렸다. 시즈는 이를 악물며 온 힘을 다해 막아냈지만 화마의 압박은 단순한 공격을 넘어선 위협이었다. 그의 불꽃은 무기나 술식이 아니었다. 불의 본질을 쥐락펴락하는 듯한 그 힘은, 마치 순수한 파괴 그 자체였다.


사제가 몸을 날리듯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손에서 다시금 검붉은 화염이 피어오르더니, 불길을 두른 주먹이 방어막을 강하게 내리쳤다. 순간 폭발적인 열기가 파도처럼 퍼져나가며 보호막에 날카로운 균열이 번졌다.


"으으윽...!"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사제는 멈추지 않았고, 불꽃으로 주먹을 감싸더니 무자비한 연타를 쏟아부었다. 끝을 모를 격렬한 충격이 연달아 박히면서 푸른빛의 보호막은 급격히 흔들리며 표면이 조각나듯 깎여나갔다. 숨 쉴 틈조차 없는 맹렬한 공격은 불의 화마가 인간의 형상을 빌려 몰아치는 듯한 무자비한 연격이었다.


"이 따위 방어에 의존해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사제가 몸을 비틀며 회전하듯 발을 차올렸다. 불꽃이 감긴 발끝이 보호막을 강타하자 깨져나가는 파장이 굉음을 내며 번졌고, 시즈가 이를 악물고 버텼음에도 방어막은 산산이 박살 나버렸다. 깨진 장막의 반동이 역류하듯 폭발하면서 충격이 시즈의 몸을 거칠게 밀어내자 그녀는 반격할 틈조차 없이 허공으로 튕겨 나가 절벽의 바위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커흑......!"


거대한 절벽에서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며 시즈의 주변을 메웠다.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충격으로 시야가 흔들렸고, 폐부 깊숙이 파고든 뜨거운 공기에 숨조차 가쁘게 토해낼 뿐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사제는 느릿하게 다가오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그의 손끝에 피어난 불꽃은 조금 전까지의 검붉은 불길이 아닌 치명적으로 새빨간 불꽃이 솟아올랐다.


순간, 시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불길한 기운 너머로 스며드는 낯설지만 익숙한 그 결은 어딘가에서 이미 접한 적 있는 불꽃의 흐름이었다.


"...혹시... 당신이... 노아의......?"


그 한마디에 사제의 몸이 굳어섰다. 맹렬하게 몰아치려던 손이 돌연 멈추더니, 타오르던 불길은 불안정하게 요동치다가 결국 꺼져버렸다.


"......너 뭐야."


낮게 떨리는 목소리가 까마귀 가면 너머에서 새어 나왔다.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사제의 손이 시즈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방금 전까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가면 너머의 시선은 평정심을 잃고 격렬히 뒤흔들리고 있었다.


"당장 말해! 네가... 네가 어떻게... 15년 전에 사라진 내 동생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거냐!!"


그때, 지반이 깊게 떨리며 둔탁한 울림이 퍼졌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지더니 이내 커다란 균열이 번졌다. 금이 벌어지며 바위 조각이 쏟아져 내렸고, 절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오미누스는 번지는 붕괴를 보자마자, 조금 전까지 맞서고 있던 베리엘을 거칠게 밀쳐낸 뒤 시즈를 향해 치닫던 불꽃의 사제를 향해 몸을 던졌다. 칼날이 휘광을 그리며 가차 없이 내려 꽂혔지만 사제가 발끝으로 바닥을 박차며 날렵하게 피하자, 오미누스는 재빠르게 시즈의 허리를 감싸 안은 뒤 곧장 무너져 내리는 절벽의 균열을 향해 돌진하듯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절벽 뚫고 바깥으로 빠져나가자마자, 거대한 바위들이 작업장 전체를 뒤엎으며 쏟아져 내렸다. 오미누스는 낙하하는 절벽의 파편 속에 칼날을 역으로 꽂아 넣었다. 칼날이 바위에 깊숙이 박히며 충격을 흡수했고, 그 매달림을 이용해 오미누스는 떨어지는 속도를 늦췄다.


바닥이 가까워지자, 그는 절벽에 발을 딛으며 힘껏 도약했다. 바위가 땅에 떨어지는 굉음과 함께 튕겨 오르듯 도약한 몸이 날아들었다. 두 발이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고, 먼지가 걷히면서 두 사람 앞에 파괴된 동쪽 신계의 관문이 드러났다.


"하아... 허억...!"


시즈는 바닥에 손을 짚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빠져나온 곳이 하필 이곳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굉음이 곧 생각을 끊어냈다. 그녀는 힘겹게 시선을 들어 반쯤 무너져 내리는 마르프록스 산의 절벽을 바라봤다.


"산이......"


절벽은 균열마다 여전히 요란하게 울리며 줄지어 무너져 내리면서 지반을 뒤흔드는 폭발음이 뒤따랐다. 붉은 섬광이 바위 잔해 밑바닥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오더니 검은 연기를 갈라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베리엘이었고, 그의 곁으로는 까마귀 가면을 쓴 불꽃의 사제들이 다시금 줄을 지어 섰다. 돌가루가 눈처럼 흩날리고 땅속에서 치솟는 불길이 그들 뒤에서 무겁게 타올랐다.


"인간 주제에 제법이군."


베리엘의 목소리는 쇳조각이 갈려나가는 듯 묵직하고 거칠게 울려 퍼졌다. 시즈를 향한 그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증오가 겹쳐 있었다.


"그 정도의 마력을 품은 무녀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경이로울 만큼 놀라워."


그의 시선은 곧장 오미누스로 옮겨갔다. 날이 선 기류가 단숨에 바뀌며, 칼날 위로 매섭게 꽂히는 눈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너. 인간도 심연의 이물도 아닌 네놈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하지만 그 칼날만큼은 받아내야겠다."


하지만 오미누스는 눈빛조차 흔들지 않은 채 날카롭게 응시했다. 차갑고 무심한 눈길이 고스란히 베리엘을 꿰뚫자, 그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좋아. 그렇다면 진짜 힘으로 빼앗아 주지."


그 말과 함께, 그의 육신에서 불길한 기운이 치솟았다. 거대한 어깨를 뒤덮은 암녹빛 로브가 안쪽에서부터 불룩하게 솟아올랐고, 살을 찢고 솟구친 깃털들이 파문처럼 펼쳐졌다. 듬성듬성 나 있던 깃털이 검은 파도처럼 이어지더니, 로브가 양옆으로 갈라지듯 찢겨나갔다.


절망을 품은 듯한 거대한 검은 날개. 그것이 완전히 펼쳐지면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주변 공기를 짓눌렀다.


단순한 위압을 넘어 땅과 하늘을 가르는 파동이 온몸을 덮치자, 그 모습에 시즈는 돌연 불길처럼 기억이 밀려들었다. 타리안 성채 앞, 피투성이로 쓰러졌던 바르그의 전신을 꿰뚫고 있던 수십 개의 뒤틀린 검은 창. 그 살벌한 형상이 눈앞의 기운과 겹쳐지자, 몸속 깊은 곳이 얼어붙는 듯 서늘해졌다.


'......설마.'


일지 속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온전한 모습으로 태어났던 단 하나의 검은 익인 아기와 지금 눈앞에서 날개를 펼쳐낸 존재와 겹쳐지면서 시즈는 숨이 막히듯 가슴이 죄어왔다. 뼛속까지 차오르는 서늘한 깨달음이 아직 말로 다 드러나기도 전에 불길한 기운은 더욱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 순간, 동쪽 관문 폐허의 균열 너머에서, 썩은 숨결 같은 독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커먼 안개는 바람을 타듯 흘러나와 순식간에 주변을 물들였고, 그 속에서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울루니아들이 하나둘 기어 나왔다.


악취를 품은 점액을 질질 끌며 나타난 그들은 가장 먼저 검은 날개를 펼치고 서 있는 베리엘을 향해 낄낄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호오... 이게 무슨 구경거리람?"


흐물거리는 살덩이 사이로 찢어진 입들이 제각각 떠들어댔다.


"답답해서 간만에 비상이라도 하려는 건가? 꼴이 제법 우스운데 말이야."


연이른 조롱에 베리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날카로운 안광으로 괴물들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여긴 왜 기어 나온 거지? 내 허락 없이는 멋대로 영역을 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산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데, 이 재미난 구경을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어? 안 그런가?"


괴물들은 베리엘의 분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거대한 몸뚱이들을 출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그들의 시선이 시즈와 오미누스에게 닿았다.


"오오... 새로운 먹거리인가."


혀처럼 길게 늘어진 촉수가 허공을 더듬자, 곁의 또 다른 덩치큰 형체가 비웃듯 툴툴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두 마리뿐이군. 한놈은 너무 작아서 코에도 안 붙겠어."


베리엘의 부리 위 미간이 깊게 일그러졌다. 검은 날개 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억눌러온 숨이 짧게 잘렸다. 그는 한 박자 늦춰 낮게 말을 이었다.


"보름 동안... 충분히 즐겼을 거라 생각하는데."


울루니아들이 합창하듯 낄낄거렸다. 점액질의 목울대가 출렁이며, 검보랏빛 고름이 바닥으로 뚝뚝 낙하했다.


"맛은 봤지. 그런데 매번 먹던거라 질리더군"


"그러니 좀 더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해."


"게다가... 어차피 우리 없이는 네 녀석이 '그곳'을 치기도 어렵잖아?"


시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곳'이라니. 저 흉측한 괴물들과 타락한 익인들이 연합하여 노리는 목표가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어디를 치겠다는 것일까.


시선은 자연스레 베리엘의 곁에 도열한 자들에게 닿았다. 낡고 헤진 검붉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무언가 변질됐지만 분명한 화염의 기운을 다루는 자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을 몰아붙였던 그 맹렬한 불꽃의 주인.


순간, 뇌리에서 조각이 맞춰지듯 섬뜩한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불을 숭상하는 자들이 타락하여 이곳에 있는 것. 불의 장벽으로 왕래가 끊겨버린 고원 너머의 불의 도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것은 단순한 조우가 아닌 대륙 전체를 뒤흔들 재앙의 서막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설마... 이들이 노리는 곳이 이그니카란 말인가.


제목 없음-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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