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규환
조롱의 말끝으로 공기가 서늘히 식었지만, 베리엘은 코웃음을 치며 그들을 차갑게 훑어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무례한 건 변함이 없구나. 네놈들의 우두머리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평소에도 제멋대로 굴더니, 요즘은 아예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군."
베리엘의 물음에 울루니아들은 불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 반응에 베리엘의 눈초리가 번개처럼 가늘어지더니, 낮은 중얼거림이 부리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이래서야 원... 그동안 먹이를 갖다 바치는 꼴이었나."
그 말과 동시에 베리엘은 순식간에 허공을 향해 솟구쳤다. 그의 손길이 로브 안쪽 허리춤에 매달린 가죽 띠를 스치자, 청록빛으로 발광하는 유리병 대 여섯 개가 바람을 가르며 위에서 아래로 궤적을 그렸다. 이어서 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청록빛 액체가 빗물처럼 흩뿌려졌다.
밝게 빛나는 청록빛 액체들이 가까워지자, 뒤늦게 잘못됨을 감지한 울루니아들은 허둥대며 흩어졌다. 하지만 육중하고 거대한 그들의 몸뚱아리가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치이이이익————
액체가 살갗에 닿는 순간, 끔찍한 비명과 함께 피부 표면이 포말처럼 부풀어 올랐다. 껍질 같은 막이 거품을 토하며 주름지더니 안쪽의 살덩이와 점액이 엉겨 붙어 층층이 벗겨져 내렸고, 울루니아들은 목구멍을 긁는 듯한 괴성을 질렀다.
"끄와아아아아아아앍———!
"꾸어어어어어억—— 꺼으르르륵———"
검보랏빛 점성이 연기를 내며 끓어올랐고, 청록빛 액체들은 마치 염산이 물체를 녹이듯 울루니아들의 피부를 뚫고 그대로 안쪽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소금에 닿은 달팽이처럼 형체가 그대로 주저앉아 녹아내리거나 몸통 가운데가 통째로 끊어지면서 미처 소화가 덜 된듯한 토사물을 쏟아내는 등, 제각각으로 순식간에 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바닥은 지독한 냄새를 뿜는 얼룩으로 번져 들었고, 독기와 휘말린 수증기가 낮게 깔려 시야를 일그러뜨렸다.
눈앞에서 거대한 형체들이 녹아 사라지는 광경에 시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오미누스조차 어깨를 낮추며 순간 몸을 움츠렸다. 천천히 두 사람 앞에 내려앉은 베리엘은 검은 날개를 접으며, 당장이라도 찢어발길 듯했던 기세를 거두고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이미 승패가 결정 난 판을 관조하듯, 무기를 꺼내드는 대신 느릿하게 손을 뻗어 오미누스의 칼날을 가리켰다.
"그 칼날에 서린 거대한 기운... 너희는 그 안에 담긴 힘의 깊이를 짐작이나 하느냐?"
그의 목소리는 베리엘 본연의 거친 쇳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깊은 틈새 밑바닥에서 기어 나온 듯, 겹겹이 쌓인 원념이 뒤섞인 기괴한 공명이 섞여 있었다.
"너희도 느끼고 있겠지? 발밑, 저 까마득한 지하에서부터 올라오는...... 짓눌린 비명과도 같은 진동을 말이다."
베리엘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찢어지며 황홀경에 빠진 광신도처럼 번들거렸다. 그는 허공을 움켜쥐는 시늉을 하며, 보이지 않는 기운을 탐닉하듯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 산맥의 뿌리가 닿아 있는 그 깊고 어두운 틈새... 그곳에는 오만한 빛이 심판이라는 기만으로 하늘을 태웠던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식지 않은 검은 맥박이 뛰고 있다. 신들이 제멋대로 규정한 섭리 따위가 감히 덮을 수 없었던, 심연 가장 깊은 곳에서 눈물 흘리는 자의 서러운 권능이지."
그의 목소리는 점차 고조되었다. 단순한 설명이 아닌, 위대한 존재를 찬양하는 시(詩)를 읊는 듯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 힘은 굶주려 있다. 무언가를 잉태하기 위해, 혹은 삼켜버리기 위해 수천 년을 기다려왔지.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 썩어빠진 세상의 허울을 찢고, 그 위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새로운 섭리를 세우기 위해 준비된 원대한 숙원이다."
시즈는 그의 눈빛에서 소름 끼치는 위화감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익인이었으나, 그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은 명백히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 힘을 깨워서, 대체 어디에 쓰려는 거지?"
"쓰다니? 표현이 잘못되었구나, 어린 무녀여."
베리엘은 짐승의 부리를 비틀어 기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것은 되돌리는 것이다. 썩어 문드러진 과거의 뿌리를 도려내고...... 그 자리에 심연 깊은 곳까지 닿아 있는 진정한 주인의 뿌리를 내리는 성업(聖業)이지."
그는 발아래의 땅을 내려다보며, 마치 그 속에서 자라날 무언가를 이미 보고 있다는 듯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대지의 심장이 품은 그 태고의 열기가 심연의 씨앗과 만나는 날...... 검은 줄기가 하늘을 뚫고 솟아오를 것이다. 그 거대한 그늘이 세상을 덮으면, 비로소 만물은 거짓된 빛이 아닌 안락한 어둠 속에서 다시 태어나리라. 오직 그분의 권능만이 가득한, 완벽한 암흑의 낙원으로서!"
광기로 점철된 말 이면에 도사린 불길한 함의는 시즈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부수고 무너뜨리는 파괴가 아니었다. '뿌리를 내린다'는 말... 그것은 지금의 섭리를 뿌리째 뽑아내고 그 빈자리에 이질적인 무언가를 심어, 세상의 근간 자체를 송두리째 뒤바꾸려는 끔찍한 개벽(開闢)을 획책하고 있다는 뜻일까.
저 검은 익인이 말하는 '주인'이 누구인지, 그 심연의 씨앗이 무엇을 잉태하려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허나 확신에 찬 눈앞의 광기를 마주한 순간, 다가오는 위협이 단순히 산맥 하나를 무너뜨리는 수준의 재앙이 아님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베리엘은 몽환에서 깨어난 듯 다시 서늘한 눈빛으로 오미누스를 쏘아보았다.
"그러니 내놓아라. 그 칼날 또한... 위대한 그분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할 테니!"
그는 다시 클로를 꺼내며, 오미누스를 향해 겨누었다. 그렇게 서슬 퍼런 칼날이 쇄도하려는 찰나, 섬뜩한 고동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쿵, 두쿵.
청록빛 액체에 녹아 흩어진 괴물들의 찌꺼기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한 데로 흘러들어 점액의 웅덩이를 만들며 부풀어 올랐다. 응고한 덩어리들의 표면이 심장처럼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면서 핏줄 같은 줄기처럼 솟아 서로 엉겨 붙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관문 기둥을 가볍게 넘는 높이까지 치솟더니, 마치 집을 열 겹으로 포개 올린 듯한 거구가 되었다. 형체도 다 갖추지 못한 채 우뚝 선 그것은 뼈 없는 몸통 곳곳에 벌어진 구멍이 눈처럼 번쩍이며 거품 섞인 검보랏빛 비말을 숨결처럼 뿜어냈다.
괴물이 채찍 같은 촉수를 내지르자 바닥은 두부가 으깨지듯 순식간에 파였다. 베리엘은 날개를 치켜세워 위로 솟구쳐 회피했고, 오미누스는 반사적으로 시즈의 허리를 그러안아 측면으로 굴러 빠졌다. 그 뒤를 파고든 비말이 떨어지자, 박살 난 잔해들은 한순간에 검게 녹아내렸다.
불꽃의 사제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까마귀 가면 너머의 눈빛이 붉게 번쩍이고, 양팔에서 검붉은 화염구가 빗발쳤다. 화마가 괴물의 껍질을 도려내듯 타오르면서 하얀 수증기와 악취가 한꺼번에 솟구치자 괴물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 거대한 덩치의 꼭대기, 머리라 부를 만한 부분이 서서히 산을 향해 몸을 틀자, 베리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뿔싸......!"
베리엘의 부리가 딱 소리를 냈다.
"저걸 산으로 못 가게 막아! 지금 당장!!!"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리엘의 검은 날개가 폭풍처럼 펼쳐졌다. 땅을 박차며 솟구쳐 오른 그는 산맥을 향해 한 줄기 검은 유성처럼 날아갔다. 그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모조리 태워버려라! 저것이 산을 집어삼키기 전에!"
베리엘의 절박한 외침과 동시에 불꽃의 사제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까마귀 가면 너머로 붉은 안광이 섬뜩하게 타올랐고, 열 명 남짓한 사제들의 손아귀에서 피어난 검붉은 화염구들이 포탄처럼 쏟아져 내렸다. 화염은 비처럼 쏟아져 거대한 살덩어리 괴물의 몸에 작렬했다. 살이 타는 악취와 함께 괴물의 표피가 녹아내리며 검은 증기를 뿜어냈다. 고통에 찬 괴물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거대한 몸을 뒤틀어 그대로 산의 암벽을 들이받으며 충돌하는 순간, 검보랏빛 부패가 마치 살아있는 독물처럼 산의 아래에서부터 스며들기 시작했다.
부패는 순식간에 산맥의 혈관을 파고드는 역병처럼 내부를 향해 빠르게 잠식해 들어갔다. 산속에 깃든 모든 생명체의 기척을 찾아내 잡아먹으려는 듯 그 움직임은 탐욕스럽고 끈질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까의 전투와 괴물의 충격이 맞물리며, 이미 한 차례 붕괴했던 산맥의 중턱이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거대한 굉음과 함께 절벽의 단면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작업장의 잔해 위로 새로운 바위들이 쏟아졌고, 그와 함께 산맥 내부에 숨겨져 있던 감옥의 일부가 흉측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훼손된 구조의 틈새로, 불에 그을린 죄수들이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뒤를 따라, 기괴한 형상의 간수들 또한 모습을 드러내 도망치는 죄수들의 발목을 붙잡아 어둠 속으로 다시 끌고 갔다. 비명과 절규,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뒤엉켜 산 중턱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지금이야말로 벗어나야 돼."
아수라장이 된 전장을 지켜보던 오미누스가 나직이 말했다.
시즈가 고개를 끄덕이고 혼란을 틈타 몸을 돌리려던 바로 그 순간, 오미누스는 갑자기 품속에서 엘라마의 혈석을 꺼내 들었다. 빛을 잃었던 혈석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청록빛을 토해내며 하나의 방향을 향해 필사적으로 빛줄기를 쏘아 올렸다.
'설마...!'
빛이 꺼졌을 때 심장을 옥죄던 불안감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시즈는 홀린 듯 혈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검게 죽어가는 산의 중턱.
무너지는 잔해와 비명 속, 죽음의 구렁텅이로 변한 그 아비규환의 한복판을 헤쳐 내달리는 한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작은 소녀를 품에 안은 채 필사적으로 질주하는 그 모습.
아로스, 그가 저곳에 있었다.
아수라장이 된 산 중턱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무너져 내리는 바위와 흙먼지 사이로, 불에 그을린 죄수들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로스는 한 손으로 작은 소녀를 단단히 품에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쥔 채 앞을 가로막는 간수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그의 등 뒤에서는 벨라미가 죽을힘을 다해 쫓아오면서 악을 써댔다.
"이러다 다 죽는 거 아니야!? 앞뒤로는 저 괴물 같은 간수 놈들, 옆은 그냥 낭떠러지라고! 우린 완전히 독 안에 든 쥐야!"
벨라미의 절규는 굉음에 묻혔지만, 아로스는 군말 없이 앞을 막아서는 간수의 도끼를 칼로 받아쳤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산맥이 무너져 내리는 바로 그 순간부터 온몸을 옥죄던 불길한 기운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족쇄처럼 짓누르던 무력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본래의 힘이 혈관을 타고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힘겹게 밀어붙일 필요도 없었다. 간수의 도끼를 가볍게 옆으로 흘려낸 뒤 스치듯 칼을 휘두르자 간수의 목은 분수 같은 핏줄기를 뿜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육중한 몸뚱이가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본 아로스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간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단 한 번의 검격에 철가면을 쓴 간수의 상반신이 비스듬히 잘려나가며 나뒹굴었다. 힘이 돌아오고 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죽어라 달렸다. 하지만 그들을 위협하는 것은 간수들만이 아니었다. 산 아래에서부터 검보랏빛 부패의 기운이 맹렬한 속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파도처럼 죄수와 간수를 가리지 않고 집어삼켰다. 부패에 닿은 자들은 살이 녹아내리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검은 얼룩으로 변해갔다.
"저게 뭐야! 이번엔 땅까지 우릴 잡아먹으려고 하잖아!"
벨라미가 새파랗게 질려 소리치는 그때, 그들 옆의 무너진 바위틈의 어둠 속에서 검보랏빛을 띤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질척이는 점액소리와 함께 파도의 악마들이 녹아내리는 몸뚱아리를 들이밀며 덮쳤다. 하지만 그들의 몸이 닿기도 전에 아로스의 칼날이 섬광처럼 허공을 갈랐고, 파도의 악마들은 파고들 틈조차 없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반으로 갈라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아아아아악!!"
뒤따르던 벨라미는 바로 옆에서 튀어나온 악마를 보고 자빠질 듯 비명을 질렀다. 그는 허우적거리며 가까스로 몸을 피했고, 끈적거리는 손길은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