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충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에, 시즈는 불안한 눈빛으로 아로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로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따라갔다.
에드바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관문의 부서진 잔해 위로 먼저 올라섰다. 말없이 뒤를 따른 아로스는 괴물이 사라진 검은 잿더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지?"
"나는 보았다. 무녀를 바라보는 너의 눈빛을. 그리고 무녀가 너를 끌어안던 그 순간을. 감정은 사치다. 이 잿더미 같은 세상에서 온정은 가장 먼저 자신을 불태우는 불씨가 될 뿐―"
"웃기지 마라."
아로스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에드바르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아로스는 물러서지 않고 그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족쇄 따위가 아니야. 내가 쓰러질 때마다 날 일으켜 세운 건 그녀의 믿음이었고, 나 또한 그녀를 위해 검을 들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기댔기에 우린 여지껏 살아남은 것인데, 당신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아로스의 목소리에는 시즈와 함께해 온 시간들에 대한 확신, 그리고 자신들을 부정하는 자에 대한 날 선 적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에드바르는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대꾸했다.
"살아남았다고? 고작 몇 번의 요행을 실력이라 착각하지 마라. 네가 기댄 그 믿음이라는 것이 앞으로 마주할 가혹한 여정 앞에서는 종잇장보다 얇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
"모르는 건 당신이지. 혼자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우리는 함께 넘어왔다. 네놈이 말하는 그 '사치스러운 감정'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진작에 무너졌을 거다! 우리는 서로를 지키며 강해졌다. 그것이 나와 그녀의 방식이고, 우리의 길이야!"
아로스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순간, 에드바르의 표정이 걷잡을 수 없이 일그러졌다. 마치 억눌러왔던 뇌관이 터진 듯했다.
"자만하지 마라!"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에드바르는 아로스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그의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고, 외눈에서는 광기에 가까운 격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지탱하는 힘? 서로를 위한 검? 닥쳐라! 그따위 달콤한 말장난이 언제까지 통할 것 같아?"
"......!"
"네가 그녀를 힘이라 믿는 그 순간이... 바로 놈이 파고들 틈이다! 그 잘난 '유대' 때문에 대가는 네 목숨이 아닌 그녀의 처참한 죽음이 될 거다! 나라고 몰랐을 것 같으냐? 나 또한 너처럼 믿었다. 지킬 수 있다고, 내 힘으로 그녀를 향한 모든 위협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 여겼지. 하지만 보아라! 그 오만의 대가가 무엇인지!"
에드바르는 투구를 벗어던지며 자신의 문드러진 얼굴을 보란 듯이 내비쳤다. 그것은 살아있는 실패의 증거이자, 혼자서 감당하려다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비명이었다.
"무언가 잃을 것이 생긴 순간... 너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어."
아로스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눈앞의 사내가 토해내는 처절한 절규는 차가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에드바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런 아로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마지막 선고처럼 낮게 읊조렸다.
"정말로 그녀를 지키고 싶다면... 그녀가 올려다볼 수 없는 벽이 되고, 그녀가 만질 수 없는 그림자가 되어라. 네 마음을 지워.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에드바르는 다시 투구를 집어 들어 눌러쓴 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은 채 먼저 등을 돌렸다. 아로스는 그런 에드바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등은 단순히 패배자의 것이 아닌 거대한 묘비였다. 사랑했기에 모든 것을 잃고, 지키려 했기에 철저히 파괴당한 한 남자의 남겨진 껍데기. 그의 독설은 저주가 아닌 불길 속에 소중한 이를 묻어본 자만이 할 수 있는 피 맺힌 유언과도 같았다. 나는 과연... 저 묘비의 말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짧고 무거운 대화를 끝으로, 아로스는 말없이 멀어져 가는 에드바르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돌아온 자리에는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기다리던 시즈와 오미누스의 시선이 날카롭게 꽂혔다. 그 경계심을 눈치챈 벨라미가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으며 나섰다.
"워워, 다들 진정하라고. 저 양반, 겉으로는 수상해 보여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나름대로 딱한 사정이 있는 몸이라고."
그러나 에드바르는 벨라미의 변호를 비웃기라도 하듯 짧게 내뱉었다.
"...굳이 나서서 해명하지 마라."
그는 곧장 일행을 지나쳐 무너진 산맥 근처의 거대한 바위 뒤로 향하더니,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한 아이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산에서 겁에 질려 도망쳐왔던 소년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년의 등장에 아로스와 벨라미의 눈이 살짝 커졌고, 벨라미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니, 그 꼬맹이를 여기까지 왜 데려온 거야!? 설마 위험한 줄 알고도 데려온 건 아니겠지?"
에드바르는 그 외침을 무시한 채 일행 앞에 멈춰 섰다.
"난 떠난다. 루이는 너희가 맡아."
"루이? 뭐야, 이 꼬맹이 이름이 루이였어?"
에드바르는 그 물음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벨라미는 순간 그의 어조에 실린 미세한 피로감을 놓치지 않았다.
"나보다는 너희와 함께 있는 게 안전할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에드바르는 다시 한번 아로스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후회와 체념이 가득 서린 눈빛에는 방금 전 남겼던 경고의 무게가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왔을 때처럼 기척도 없이 폐허 너머로 사라졌다.
정적이 흘렀다. 갑작스럽게 두 아이를 떠맡게 된 일행 사이로 당혹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 동안 에드바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시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 사람... 대체 누구죠?"
그녀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아로스는 잠시 눈을 감고, 성벽 위에서 나눴던 대화의 잔상을 더듬었다. 같은 힘, 그러나 다른 길. 그리고 그 끝에 남은 깊은 환멸. 아로스는 천천히 눈을 뜨며, 어느새 잿빛으로 변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나간 시대의 그림자이자... 어쩌면, 제 미래였을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에드바르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아로스의 마음속에 깊은 파문을 남긴 채 폐허의 스산한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어느덧 하늘은 잿빛 구름 아래로 노을을 머금기 시작했다. 어둠이 관문의 부서진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다가오자, 시즈는 곁에 꼭 붙어 있는 두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불현듯 오미누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날이 저물고 있어요. 일단 아까 그 동굴로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요? 아이들에게 그곳에 있는 과일이라도 먹이는 게 좋을것 같은데요."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벨라미였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과일? 여기서 과일이라고!? 세상에, 내가 지금 헛것을 듣는 게 아니지?"
오미누스는 그런 벨라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시즈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는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 한마디에 벨라미는 신이 난 듯 아이들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얘들아, 들었냐? 과일이란다, 과일! 늬들 과일 맛은 아냐? 이 척박한 땅에서 과일이라니, 이건 기적이야! 달콤하고 새콤한 과즙이 입안에서 팡팡 터지는 그 맛을 알게 되면...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아저씨만 믿으라고!"
그의 유쾌한 입담에 아이들의 굳어 있던 얼굴이 아주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 소란 속에서도, 아로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깊은 상념에 잠겨있는 듯한 그의 시선은 여전히 에드바르가 사라진 어둠의 경계, 그 너머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즈는 그런 아로스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흔들리지 않는 어깨너머로 깊은 고뇌가 느껴졌다. 대체 그 흉측한 사내가 무슨 말을 건넸던 것일까. 돌아온 그의 얼굴에는 이전과 다른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침묵이 시즈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데미안은 높게 솟은 절벽 끝자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파괴된 신계의 관문 아래에서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형체는 어느 순간 완전히 움직임을 잃고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품 속을 더듬었다. 옷 안쪽, 숨겨놓은 단단한 유리병이 손끝에 닿았다. 그 안에 갇힌 진홍빛 불꽃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희미하게 고동쳤다.
'설마...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이냐?'
노아. 너무도 익숙한 이름.
무녀의 그 한마디가 데미안을 붙잡아 흔들었다. 15년 전, 카노라스를 집어삼킨 혼란 속에서 그 이름 또한 그의 기억에서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낯선 무녀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이 오래전에 묻어버린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데미안이 과거의 기억 속에 잠겨 있는 순간, 등 뒤로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기 있었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을 서늘하게 후려쳤다.
데미안이 황급히 유리병을 숨긴 채 천천히 돌아서자, 암녹빛 안광이 그를 꿰뚫고 있었다. 베리엘은 날개를 펼치지 않았음에도, 그 존재감만으로 위압감을 뿜어냈다.
"모두 안전하게 잘 피신시켰나?"
베리엘의 목소리에는 감정 하나 담겨 있지 않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이동했습니다. 만일을 대비한 물자도 실어두었으니, 몇 달간은 문제없을 겁니다."
데미안은 능숙하게 대답했다. 어떤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던 그 모습에 베리엘은 대답 없이 천천히 데미안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마치 사냥감의 약점을 살피는 맹수처럼, 그의 시선은 데미안의 가면부터 발끝까지 집요하게 훑어 내렸다.
"......내게 할 말은 그것뿐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데미안이 태연하게 되묻자, 베리엘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산 아래에서 타오르던 그 진홍빛 불길. 네 눈에도 똑똑히 보였을 텐데, 그런데도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가 뭐지?"
분노로 일렁이는 베리엘의 기운에 데미안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무녀가 술수를 부린 것 같습니다. 사제들을 일격에 쓰러뜨린 것을 보면 예사롭지 않은 힘을 지닌 것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저희가 지니고 있던 본래의 힘을 강탈했을지도 모르지요."
"너희들의 힘을 강탈했다?"
베리엘은 목을 옆으로 꺾으며 비웃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산맥 전체를 뒤흔들던 그 포효는 분명 상식을 벗어난 힘이었다.
"......너조차도 그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이겠군. 하긴, 나도 그런 마력을 품은 무녀는 처음 봤으니 말이지."
베리엘은 수긍하는 듯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넘어가 주지. 하지만 명심해라. 나는 아까 전 그 불꽃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소한 흔적 한 줌까지도 용납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만약 네놈의 불꽃에서 단 한 번이라도 그 더러운 냄새가 풍긴다면......"
베리엘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그저 날개 끝을 가볍게 떠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한참 동안 데미안을 노려보던 베리엘은 몸을 돌려 절벽 너머로 사라졌다. 홀로 절벽에 남은 데미안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손은 다시 옷 안쪽에 숨겼던 작은 유리병으로 향했다. 유리병 속의 불꽃은 여전히 춤을 추듯이 일렁였다.
15년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동생을 잃어버린 날, 고향이 파도의 악마와 틈새의 존재들에게 짓밟히던 모습, 믿음을 저버린 신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고향땅을 버리고 떠난 순간. 모든 것을 잃었다고 깨달은 데미안은 자신의 손으로 이그니카를 배신했다.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한 그에게 더 이상 돌아갈 곳은 없었다.
그럼에도, 동생의 이름이 계속해서 의식 속에 떠올랐다. 마치 그를 붙잡아두려는 사슬처럼.
'정말로 네가 살아 있다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스스로 그렇게 단언했지만 지난 15년의 세월 그 어느 순간보다 흔들리고 있었다. 확신하려는 의지와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서로 엇갈렸다. 만약 그 이름이 진짜라면 데미안은 자신이 걸어온 모든 길을 부정해야만 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확신했기에 내릴 수 있었던 결단들이... 그 피로 물든 세월의 의미가 대체 무엇이 되는 것인가?
절벽을 타고 오른 바닷바람은 데미안의 망설임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머릿속에서 노아의 이름을 말한 낯선 무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전장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동생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데미안이 잊었다고 믿었던, 그러나 단 한 번도 잊지 못한 그 이름.
노아라는 이름이, 다시금 그의 발걸음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