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웰리드 강 상류에는 가지 마오, 젊은이. 물결이 속삭이는 건 옛 영광이 아니라네. 첫 번째 물굽이에선 신들의 한숨이 들려오고, 두 번째 물굽이에선 이름 없는 망령들이 손짓하지. 마지막 물굽이에 다다르면, 그대는 보게 될 걸세. 황금이 썩어 문드러진 땅과, 그 땅을 지키는 죽은 자들을. 돌아오지 말게, 돌아오지 말게. 그 강은 오직 죽음으로만 흐르니...
뱃노래, '카노라스의 비가(悲歌)' 中
의식의 마지막 날, 노아의 세상은 한 점으로 축소되었다. 40일간의 식음 전폐는 그를 한계 너머로 내몰았다. 피가 마르고 살이 말라붙는 감각,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통은 이미 오래전에 무감각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노아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굶주림이나 갈증이 아닌 제단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였다. 미약했던 온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강해지더니, 이제는 살을 태우는 불길처럼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글거리는 열기 앞에서 버티는 것은 그 자체로 고문이었고, 정신은 쉴 새 없이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불이 꺼진 도시의 모습 위로 형 데미안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너무도 어릴 적의 기억이었음에도 대사제 앞에서 사제의 자격을 부여받던 형의 늠름했던 모습은 뇌리에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그 기억만이 노아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온기였다. 허나 그 온기마저도 눈앞의 열기에 녹아내릴 듯 위태로웠다.
'더는... 못 버틸 것 같아......'
처음으로 포기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는 것은 이제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이대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앙상하게 말라붙은 뼈에 새겨진 마지막 유혹.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다. 육신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닌, 이대로 눈을 감으면 형을 찾아 헤매던 그 간절했던 시간마저 허무한 잿더미가 되어버릴 것 같다는 공포. 위태롭게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은 것은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마지막 고집이었다.
노아는 갈라진 입술을 깨물며 마지막 남은 모든 것을 끌어모았다. 꺼져있는 제단 위에 얹은 손끝으로, 그는 자신의 마지막 숨결과 의지를 흘려보냈다.
그 순간, 재 속에서 아주 작은 불티 하나가 피어올랐다.
화르륵—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롭게 깜박이던 그 빛은 끝내 꺼지지 않았다. 노아의 의지에 화답하듯, 불씨는 완고하게 몸집을 키워나갔다. 이내 작은 불꽃이 되었고, 그 불꽃은 마른 장작에 옮겨 붙듯 순식간에 제단 전체를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아아아———
제단에서 터져 나온 불길은 맹렬한 기세로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그것은 시작의 신호였다. 잠들어 있던 생명이 깨어나듯, 이그니카의 심장부에서부터 거대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땅이 흔들리면서 꺼져 있던 신전의 기둥 위로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하나둘씩 불기둥이 터져 올라왔다.
"이... 이럴 수가!"
신들의 용광로에서 작업을 하던 아마룬을 비롯한 모든 거인들이 경악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과거의 영광 속으로 잊혀졌던 불의 도시가 다시 깨어나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시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바라보던 그들의 눈은 이내 경이로움으로 커다래졌다.
10년 만에 처음 보는 도시의 불꽃. 잊고 있던 희망. 어느새 제단 주변으로 수백, 수천의 인파가 강물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제단을 향해 엎드려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피워낸 불길과 그 앞에 경배하는 수천의 인파를 바라보던 노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형... 나, 잘했지?'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안도감, 그리고 형에게 칭찬받고 싶은 어린 동생의 마음. 그와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있던 정신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시야가 흐려지면서 몸이 힘없이 뒤로 기울었다.
그의 등이 차가운 바닥에 닿기 직전, 거대한 손이 노아의 몸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노아!"
제단으로 폭풍처럼 뛰어 올라온 아마룬이 쓰러지기 직전의 그를 붙잡은 것이었다.
"망할 꼬맹이, 결국 해냈구나! 네가 해냈어!"
격려와 안도가 뒤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고생 많았다. 이제는 좀 쉬어라."
그 말에 안심한 듯, 노아는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깊은 어둠 속으로 의식을 흘려보냈다. 아마룬은 그런 노아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 위에 올려 품에 안았다.
그때, 제단 반대편에서 오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제단의 불길과 그 앞에 쓰러진 작은 필멸자를 잠시 바라보던 신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증명했군."
오르드는 잠든 노아를 안고 있는 아마룬을 향해 말했다.
"새파랗게 어린 필멸자가 생각 이상으로 강인하구나. 저 작은 의지 하나가... 도시를 다시 깨울 줄이야."
오르드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피눈물처럼 불을 흘리는 무너진 신계, 데오르 니아. 어딘가 고요하고도 깊은 그의 시선은 그곳 어딘가에 있을 오랜 친우를 향하고 있었다.
해안가를 따라 여섯 사람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해가 기울며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 오미누스가 말없이 길을 이끌었고, 그 뒤를 시즈와 아로스가 각자 아이들을 챙기며 묵묵히 걸었다. 그 적막을 채우는 건 오직 벨라미의 끊임없는 수다뿐이었다.
벨라미는 정말 말이 많았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부터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자신이 마셔본 술의 종류부터 시작해서 감옥에서 겪었던 억울함,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한 불평까지.
"아니, 근데 여긴 길도 험한데 왜 이렇게 춥기까지 한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겉옷이라도 하나 챙겨 나오는 건데. 그나저나 꼬마 아가씨, 내 손은 놓고 왜 무녀님 손을 잡은 거야? 이 벨라미 님 서운하게."
조금 전, 벨라미에게 안겨 오던 미에르는 그의 끝없는 수다를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린 채 말없이 시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감옥과 산 중턱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던 아이의 얼굴이 꾸겨질 정도였으니 그의 수다가 얼마나 지독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미누스는 애초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고, 시즈와 아로스는 어느 순간부터 듣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시즈는 걷는 내내 곁에 선 아로스를 힐끔거렸다. 2주라는 시간의 공백을 메우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어딘가 무겁게 가라앉은 옆모습에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벨라미의 끝없는 수다 속에서 아로스를 불러보려 해도 그는 오히려 벨라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척하며 교묘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평소라면 벨라미를 타박했을 그가 지금은 오히려 그 소음을 반기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때, 거센 바닷바람이 불어와 시즈의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옷깃을 파고들었다. 시즈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자, 앞만 보고 걷던 아로스가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막아섰다. 거대한 갑옷이 든든한 방벽처럼 바람을 가려주며 한결 걷기가 수월해진 시즈는 고마움에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아로스의 시선은 끝내 그녀에게 닿지 않은 채 앞만을 향하고 있었다. 철저하리만치 무심한 태도였으나 그의 행동은 부정할 수 없이 따스했다. 시즈는 그 묘한 거리감에 무어라 하고 싶었지만, 결국 미에르의 손을 더 꼭 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해가 기울고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멀리 나무들 사이로 동굴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습기가 감돌았고, 공기는 서늘했지만 바깥의 칼바람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늑했다.
"요호우! 살아있는 이끼 침대라니!"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벨라미가 환호성을 지르며 침상으로 몸을 던졌다. 그 모습을 본 시즈는 피식 웃으며 바구니에서 잘 익은 붉은 과일 두 개를 꺼내 아이들에게 건넸다. 아이들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허겁지겁 과일을 받아 들고 정신없이 베어 물기 시작했다.
중앙에서는 아로스와 오미누스가 불을 지피고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불꽃이 작게 일어나며 따스한 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어이, 형씨! 나도 하나만 던져줘 봐! 나도 목숨 걸고 여기까지 함께 왔는데 그 정도는 괜찮잖아?"
벨라미가 침상에 누운 채 보채자, 불을 지피던 아로스는 무심히 사과 하나를 집어 그를 향해 툭 던져주었다. 벨라미는 능숙하게 그것을 받아 들고는 아이처럼 신나게 과일을 베어 물었다.
불꽃이 타닥타닥 거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위벽에 비친 그림자가 흔들리며 동굴 안에는 은은한 온기가 퍼졌다. 벨라미의 옆으로는 그가 떼어준 은엽이끼 위로 두 아이가 서로에게 기댄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피곤에 지친 몸들이 조금씩 노곤해지던 와중, 과일을 우물거리며 조용히 있던 벨라미가 불현듯 적막을 깼다.
"...그래서, 무녀님하고 형씨는 어쩌다 같이 다니게 된 거야?"
그의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아 훑었다. 이번에는 장난스러운 말투도, 의미심장한 기색도 없었다. 그저 자연스레 나온 질문이었다.
아로스는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짧게 답했다
.
"...함께할 이유가 있어서."
"하, 그건 너무 성의 없는 대답인데."
벨라미의 코웃음에 시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식교회에서 만났습니다."
시즈의 대답에 벨라미가 과일을 한입 베어 물며 재차 질문했다.
"그때부터 같이 다닌 거야?"
"저는 언령을 찾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고, 이분은 자신의 정체를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벨라미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었다.
"흠, 결국 목적이 겹치게 되면서 같이 다니게 됐다?"
"그렇습니다."
"그럼 딱히 정해진 계약 같은 것도 없는 거야?"
"서로가 필요했던 것뿐이죠."
시즈의 담담한 대답에, 벨라미는 그녀를 힐끔 보다가 피식 웃으며 몸을 눕혔다.
"뭐, 그러다 보면 정드는 법이지."
벨라미는 바닥에 깔린 은엽이끼를 툭툭 치다가 시선을 구석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저 쬐끄만 친구는 뭐 하는 사람이야?"
그의 시선이 동굴 한쪽에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오미누스를 향했으나, 오미누스는 잠깐 눈길을 주는 것 외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듣고 있나 본데?"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오미누스는 벨라미의 질문을 아예 들을 생각도 없는 듯 굳게 입을 닫고 자신의 부러진 칼날만 매만지고 있었다. 그 침묵에 벨라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내 흥미를 잃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벨라미가 다시 몸을 돌려 은엽이끼에 푹 파묻으려는 순간, 시즈가 문득 입을 열었다.
"벨라미, 당신은 과거에 무엇을 했나요?"
벨라미가 고개를 돌렸다.
"아까처럼 술이나 찾는 것 말고요."
"그건 왜 묻는 거야, 무녀님?"
"그냥, 궁금해서요."
"호오. 드디어 내게 관심이 생긴 거야?"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담담한 시즈의 태도를 본 벨라미는 가볍게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천천히 굴렸다.
"딱히 숨길 건 없는데."
그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어느 순간 장작불로 시선을 돌렸다. 불길이 흔들리는 걸 바라보던 벨라미는 짤막하게 말을 던졌다.
"처음에는 바다에 있었어."
아로스가 살짝 시선을 올렸고, 시즈도 조용히 듣고 있었다.
"해적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배를 지키는 일도 아니었지. 그냥... 필요한 곳에 몸을 실어 넘기는 일이었어. 돈을 받고, 때로는 사람을, 때로는 물건을 옮겼지. 어떤 놈들은 그걸 밀수라고 부르고, 어떤 놈들은 거래라고 불렀고. 그래도 덕분에 여기저기 다녀봤어. 바닷길이든, 강이든. 그 이후로는 상인이 돼서 대륙을 돌아다녔지."
벨라미는 피식 웃으며 손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근데 상인으로 지낼 때는 그렇게 오래가진 못했어."
"왜?"
아로스의 물음에, 벨라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모두가 알잖아. 파도의 악마들."
시즈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로스도 눈을 돌려 불빛 너머를 응시했다.
"그놈들이 들이닥쳤어. 하필이면 내가 카노라스에 있었을 때 말이지."
불꽃이 타들어가며 조용히 튀었다. 벨라미는 바닥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난 운이 좋았던 거야. 살아남았으니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뭐, 그런 거지. 그 뒤로는 그냥 사는 거야. 여기저기 떠돌고, 적당히 마시고, 괜찮아 보이는 일 있으면 손대고."
벨라미는 남은 과일을 하나 집어 들며 한 입 베어 물었다. 단내가 퍼졌지만,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게 다야, 무녀님. 이제 궁금증이 풀렸어?"
과일을 다 먹은 벨라미는 불빛이 일렁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기지개를 킨 뒤, 팔을 베개 삼아 누웠다.
"하아— 피곤하다. 역시 제대로 된 바닥에 눕는 게 제일 낫네."
벨라미가 은엽이끼가 깔린 바닥을 두드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끝으로, 아까까지 이어졌던 대화는 어느새 흐름을 잃고 적막이 시작되었다.
아로스는 마지막으로 불길을 정리하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장작이 바닥에 부드럽게 굴러가며 타닥, 하고 불꽃이 살짝 튀었다. 시즈는 벨라미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아로스의 곁으로 조금 더 다가앉았다. 해안가를 걸어올 때부터 느껴졌던 묘한 거리감이 떠올랐지만 지금 이 따스한 불빛 아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시즈는 언제 그래왔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소중하고 따스한 평온. 하지만 그 잠깐의 평온도 잠시, 아로스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 시즈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하던 그의 청록빛 눈동자가 아주 잠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깊고 어둡게 가라앉았다.
관문 위에서 들었던 에드바르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정말로 그녀를 지키고 싶다면... 그녀가 올려다볼 수 없는 벽이 되고, 그녀가 만질 수 없는 그림자가 되어라.'
아로스는 기대고 있는 시즈가 놀라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시즈는 의아한 듯 천천히 눈을 떴다.
"귀공...?"
아로스는 짐짓 불씨를 살리는 척하며 끝내 시즈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불이 약해졌습니다."
그뿐이었다. 더 이상의 설명도, 변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한마디와 돌아보지 않는 옆모습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차가운 벽처럼 다가왔고, 시즈는 저도 모르게 기대려던 몸을 바로 세웠다.
불꽃이 작게 흔들렸다.
시즈는 허공에 멈춰있던 자신의 손을 힘없이 거두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거절당한 무안함이나 서운함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낮에 관문 폐허에서 낯선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을 때부터였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게감이, 지금 이 순간 그를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시즈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2주 만에 재회한 그가 이유 없이 자신을 밀어낼 리 없었다. 분명 말 못 할 사정이, 혹은 혼자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시즈는 억지로 잠을 청하기 위해 등을 돌리는 대신 무릎을 끌어안고 조용히 아로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지금은 그가 만든 거리감을 존중해 주되, 결코 시선만은 거두지 않겠다는 듯.
동굴 안에는 타오르는 불빛 아래, 홀로 고뇌를 삼키는 기사와 그를 묵묵히 바라보는 무녀의 그림자만이 길게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