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된 황금의 땅 (4)

영혼의 노래

by 이샤라

벨라미의 말대로, 시즈 또한 여정을 계속하기에 앞서 아이들을 안전한 곳에 먼저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벨라미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을 뿐이었고, 그 또한 지금 만큼은 목소리의 장난기가 사라진 채 진지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로스가 차갑게 끼어들었다.


"그걸 어떻게 믿지?"


순간, 벨라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로스를 바라보는 눈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


"아니 형씨, 날 뭘로 보는 거야?"


"아이들을 지킬 책임감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아로스의 청록빛 눈동자는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채 벨라미를 똑바로 꿰뚫고 있었다. 그 시선에 벨라미는 화를 내는 대신 허탈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 정도로 밑바닥일 것 같아? 그래. 나 같은 놈이 뭘 안다고 떠드냐 싶겠지. 술이나 찾고, 매번 도망만 치고 촐싹거리기나 하는 놈으로 보이겠지만... 나라고 해서 지켜야 할 게 없는 줄 알아? 지금 같은 상황 속에서 저 꼬맹이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만큼 쓰레기는 아니라고."


섭섭함이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에 시즈가 다급하게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두 분, 그만하세요!"


시즈는 아로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벨라미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벨라미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도 그 편이 훨씬 안전하고요. 저희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벨라미는 짧게 한숨을 쉬며 아로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로스 역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불신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그 어색한 침묵 속에서, 다섯 사람은 남은 짐을 챙겨 동굴을 나서며 강 상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구불구불한 강 상류를 따라 걷는 동안 바닥은 점차 단단한 암반으로 변했고, 강물의 흐름은 느려졌다. 하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안개가 낮게 깔려 물 위를 덮으면서 머리 위를 가린 거대한 절벽이 길을 좁혀 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앞에서 희미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이 단순한 바위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거대한 신들의 석상이 강의 양옆으로 우뚝 서 있었다. 엄청난 높이의 두 형체의 한 손은 바다를 향해 뻗어 있으고, 다른 한 손은 허리춤에 놓인 무기의 손잡이를 감싸고 있었다. 카야와 라사리아와 같은 기묘한 가면으로 가려져 있는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현실에서 벗어난 듯한 위압감을 풍겼다.


석상의 눈앞까지 다다르자, 그 크기가 실감 나기 시작했다. 어림 잡아도 백 미터에 달할 듯한 장대한 형체가 구름을 뚫을 듯이 솟아 있었고, 옷자락을 연상케 하는 석조의 주름이 무게감 있게 흘러내렸다. 마치 높은 곳에서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 신들의 존재를 형상화한 눈앞의 석상은 인간이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권위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석상은 완벽하지 않았다. 거대한 금이 석상의 몸통을 타고 올라갔고, 가면의 일부는 부서져 형체가 불분명해졌다. 폭풍이 덮쳐도 끄떡없을 것 같던 존재가 세월 앞에서는 결국 조금씩 깎여 나가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위엄도 결국 시간의 파도 앞에서는 한낱 돌덩이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닳아버린 그 모습이야말로... 그들이 이 땅의 고통을 함께 견뎌왔다는 증거인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상은 여전히 굳건했다. 이곳이 한때 신들의 흔적이 남아 있던 장소였음을 말해주듯, 석상은 침묵한 채 대륙 너머의 대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책으로만 보고 들었던 풍경이었고, 시즈는 경외감이 어린 눈으로 석상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이 웰리드 강... 신들께서 의식을 치르기 위해 태초의 바다로 향했던......"


아로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석상을 바라보았다. 벨라미 또한 한참 동안 석상을 바라보더니 낮게 웃으며 짧게 중얼거렸다.


"예전만 못하네. 저 위대한 양반들도 세월 앞에선 결국 닳아가는구만."


석상을 지나 강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자, 시야가 조금씩 트이면서 강변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낡은 나루터가 있었다. 거친 물살에 닳아 색이 바랜 회색빛 목재 기둥이 강물 속으로 깊이 박혀 있었고, 줄이 풀린 채 흔들리는 계류석(繫留石)이 오랜 세월의 흔적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루터는 오래된 유적의 일부처럼 보였지만 누군가 최근까지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루터 외곽에는 두 척의 나룻배가 묶여 있었다. 물살 위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는 작은 나룻배들은 나무로 만든 단순한 구조였지만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걸 타고 가면 되겠네요."


시즈가 나룻배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아로스는 배를 살펴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미는 먼저 자신의 등에 업혀 잠든 루이를 내려놓고, 아로스의 품에 안겨 있던 미에르를 받아 조심스럽게 깨워 배에 태웠다.


"무녀님이랑 형씨가 같이 타."


그의 말에 시즈가 눈길을 들었다.


"왜 쳐다봐? 나랑 같이 타고 싶어?"


벨라미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지만, 그 말에는 별다른 설명이 덧붙지 않았다. 아로스는 짧게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미는 아이들이 타고 있는 배에 조심스레 올라탔다. 물살이 흔들리는 나룻배가 그의 무게를 받아들이며 천천히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한동안 노를 잡은 채 움직이지 않다가 마치 떠나기 전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침묵을 흘렸고, 이내 생각이 정리가 되었는지 조용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물이 부드럽게 갈라지면서 배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 시즈와 아로스도 마저 배에 올라탔다. 두 사람을 태운 나룻배도 천천히 벨라미의 뒤를 따랐다.


그때, 문득 시즈가 벨라미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벨라미, 저희는 상류로 가고 있는데... 이 방향이 남쪽으로 가는 길이 맞나요?"


노를 젓던 벨라미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걱정 마시라, 무녀님. 이 벨라미 님이 누군가. 바닷길이든 강물이든 눈 감고도 찾아가는 사람이야. 이쪽으로 가야 남쪽으로 빠지는 지름길이 나온다고.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편히 가셔."


벨라미의 능청스러움 뒤로 거대한 석상의 발치에 다가설 즈음, 멀리 동쪽 하늘 끝자락이 옅은 황금빛으로 물들며 밤의 어둠을 서서히 걷어내기 시작했다. 강물 위로 퍼져가는 잔잔한 빛이 미세한 물결을 타고 찰랑였다.


여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협곡의 내부로 들어서자 빛은 오래가지 못했다.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이었지만 협곡 안으로는 한 줄기의 빛조차 닿지 않았다. 순식간에 바깥의 빛이 차단되는 동시에 낮고 서늘한 울림이 협곡 전체를 감쌌다. 울림은 피부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이 되어 돌아왔고, 강물 위를 떠돌던 안개마저 일순간 꿈틀거리며 흩어졌다.


갑작스러운 어둠과 기이한 울림에 겁을 먹은 아이들이 서로에게 바짝 달라붙으며 몸을 떨자, 벨라미가 아이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특유의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쉬이, 쉬이. 꼬마 손님들. 너무 겁먹지 말라고. 진짜 재밌는 건 지금부터 보여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보시지."


그 순간, 어둠 너머에서 끝없는 광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대신한 공간에는 무수한 빛이 떠 있었고, 검푸른 공간 위로 거대한 흐름이 춤을 추듯 흘렀다. 은빛과 푸른빛이 뒤섞여 거대한 강처럼 이어지더니 그 속에서는 가늘고 부드러운 빛의 조각들이 끝없이 반짝였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형체가 분명하지 않았지만 멀리서 보면 마치 세상의 기틀을 짜 맞춘 실타래처럼 보였다.


시즈가 천천히 손을 뻗자, 빛의 흐름이 손끝에서 미세하게 피어올랐다가 다시 허공으로 흩어졌다. 살아있는 숨결처럼 부드럽게 피어나면서 끝없는 창공을 유영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세상의 이면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느껴졌다.


신들의 발자취가 새겨진 공간. 그러나 그 광경에 넋을 놓기도 전에, 강 아래에서 무언가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잔잔하던 수면이 서서히 물결치며 흐릿한 형체들이 강 위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단순한 흔적처럼 보였지만 점점 그 윤곽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아로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마르프록스 산맥의 동굴 속에서 자신을 치유하고 이끌어주었던 바로 그 빛과 흡사했지만 이곳의 빛들은 달랐다. 동굴의 그것들이 그저 희미한 잔광이었다면 강 위를 떠도는 존재들은 훨씬 더 선명하고 뚜렷한 형체를 지니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존재들은 동굴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형상을 지니지 않았음에도 마치 언어를 갖지 못한 자들의 대화처럼 서로에게 속삭이듯 떨리며 빛을 피워 올렸다.


특히 미에르는 그 신비한 빛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작은 손을 뻗어 반짝이는 빛을 잡으려던 아이는 그만 몸의 균형을 잃고 나룻배 밖으로 기울어졌다.


"어이쿠!"


첨벙, 하고 물소리가 나기 직전, 벨라미가 몸을 날려 미에르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그는 놀라 울음을 터뜨린 미에르를 자신의 품에 꼭 껴안았다.


"아가씨, 저건 눈으로만 보는 거야. 저런 거 따라가면 못써요."


벨라미는 미에르를 배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꾸짖는 대신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아로스의 청록빛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벨라미가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 먼 하늘 빛나던 날 은빛 바람 아래 속삭이던 손길


그 품속에서 우리는 눈을 감고 안식을 노래했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 손길은 점점 멀어지고


애타게 불러도 어머니는 등을 돌린 채 머나먼 길을 떠나셨으니.


그 틈을 타고 피어난 그림자가 금이 간 대지를 타고 번지며


형체를 이루어 세상을 적셔가며 깊은 어둠 속에서 낮은 숨을 뱉는구나.


태양은 희미하게 빛을 잃고 강물은 흐름을 놓아버렸으며


바람마저 날카롭게 변해버리니 잠든 숲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으리.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 흐려진 하늘 아래 길을 찾지만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바람 속에서 점차 멀어져 갔지.


그들은 서로의 귓가에 속삭이며 지워진 이름을 부르고


무너진 세계를 떠돌며 돌아오지 않는 자들의 노래를 읊으리.


고요한 밤, 빛이 흐려진 하늘 아래 남겨진 발자국을 헤매면서


언젠가 돌아올 그날에 따뜻한 품 속에 다시 닿기를 바라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노래. 그러나 그 선율은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구슬프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벨라미의 노래가 흐르자, 강 위를 떠도는 영혼의 빛들이 조용히 떨렸다. 그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이 선율을 알고 있었다는 듯 노래의 흐름에 맞춰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빛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허공을 유영하듯 잔잔한 강물 위를 스치며 부드러운 궤적을 그렸다. 그 움직임은 단순한 흔들림이 아니었다. 노래에 이끌려 춤을 추듯, 빛의 형상들이 서서히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부터 벨라미의 노래가 협곡에서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화음이 덧입혀지면서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깊고 풍부한 선율로 변했다. 누군가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도 아니건만, 음색은 점점 겹쳐지며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강 위를 떠도는 영혼들은 그 화음 속에서 부드러운 파동을 이루었고, 마치 하늘에 수놓아진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빛들은 찰나의 형상을 이루는 동시에 다시금 흐려지며 허공으로 퍼져 나갔으며, 한없이 깊고 잔잔한 선율 속에서 그려지는 춤은 오래된 기억처럼 나풀거렸다. 그들은 강물 위를 유영하면서 때로는 가늘게 떨리듯 피어올랐고, 때로는 하늘로 스며들 듯 부드러운 궤적을 남겼다. 빛의 흐름과 노래가 맞물리며 협곡의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연주가 된 듯했다.


시즈와 아로스는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픈 풍경이었다. 가벼운 농담 뒤에 숨겨둔 진심이 비로소 그 무게를 드러내는 순간일까. 어쩌면 그가 보여준 경박함은 이 지독한 상실의 시대를 맨 정신으로 버티기 위해 그 스스로가 만들어낸 슬픈 가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은 점점 더 모호해졌고, 형체 없는 음률이 협곡의 벽을 타고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강 아래에 잠들어 있던 것들이 희미한 흔적으로 깨어나면서 무너진 비석들, 닳아 없어진 문양들, 시간의 저편에서 잊힌 존재들이 노래의 끝자락을 따라 부드럽게 반짝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잔향에 불과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끝내 손끝을 스쳐 흩어지는 빛처럼.


그럼에도 벨라미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강을 따라 조용히 노를 저으며, 노래를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더욱 깊어졌고, 선율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두 나룻배는 노래와 함께 강의 상류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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