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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을 돌아보며

개성공단은 분단의 땅에 세운 희망의 교각이었다.

by 이 정

벌써 25년이 지났다.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이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 ‘평화통일’과 ‘남북교류협력’을 주요 내용으로 한 6·15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날의 감격은 한반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현대그룹은 2개월간의 현지조사를 거쳐 8월 22일 북한 당국과 ‘개성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고, 남북 관계기관이 함께 개성공단의 법과 제도를 마련하며 철도와 도로 등 외부 기반시설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나는 사업 초기 현지조사 시점부터 약 3년간 실무자로 참여하며 북한 전문가들과 협의했다. 그리고 2003년 8월, 개성공단 건설사업소장으로 발령을 받아 남한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에 상주하게 되었다. 당시 나의 주요 임무는 1단계 100만 평 공단 부지를 조성하기 위한 베이스캠프 구축이었다. 중장비 정비공장, 레미콘 배치플랜트, 남한 기술자 숙소 등을 설치하고, 동시에 도로와 전력 등 외부 인프라 공사를 남북한 관계기관과 협의하는 일이었다.

하루는 개성공단으로 연결되는 도로공사와 관련해 남북한 전문가들이 협의하고 있었다. 연결도로 개통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비무장지대 내 북한 구간의 사천강을 횡단하는 교량공사를 3개월 안에 완공해야만 했다.


브런치-사천강 교량사진.png

그날 회의에서 북한 관계자가 “사천강 교량의 교각 공사는 3개월이면 완공할 수 있다”라고 하자, 남한의 한 건설 전문가는 “기술적으로 3개월 안에 완공은 불가능하다. 그때까지 끝낸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반박했다. 이에 북한 관계자는 얼굴이 붉어지며 짧게 말했다.

“선생, 3개월 후에 봅시다.”

3개월 후, 북한은 약속대로 교각 공사를 완공했다. ‘3개월 안에 끝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던 남한의 토목 전문가는 다행히(?) 다른 부서로 인사이동이 되어 다시 개성에 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교량의 교각 공사는 최소 1년 이상이 걸린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떻게 3개월 만에 완공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여전히 일제강점기 시절의 화강석 쌓기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군인들이 석재공장에서 가공된 화강석을 직접 나르고 손으로 쌓아 올린 것이다.

남북이 합동으로 실시한 교량 안전진단 결과, 구조적 문제는 전혀 없었다. 지금도 그 다리는 대형 화물차가 지나다닐 만큼 견고하다.

개성공단 건설 초기에는 여러 분야에서 남북 전문가들이 함께 회의를 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체제와 언어, 그리고 사고방식의 차이로 오해가 생기기 일쑤였다. 50년 넘게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때로는 회의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북한 전문가가 다음 회의에는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긴장과 경계가 공존하던 시기였다.

부지 정지 공사를 위해 불도저, 덤프트럭, 굴착기 등 중장비 운전공을 모집할 때도 어려움이 많았다. 개성은 군사지역이라 산업 발전이 더뎠고, 지원자 대부분은 농촌에서 트랙터나 경운기를 몰아본 경험뿐이었다.
100만 평 부지를 제때 정리하려면 400대가 넘는 중장비가 동시에 움직여야 했다. 숙련된 정비공과 운전수가 절실했지만,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평양에서 내려온 북한 지도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며칠 뒤, 놀랍게도 수백 명의 건설 기능공이 개성으로 도착했다. 운전공뿐 아니라 철근공, 목수 등 다양한 기술자들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인력을 모을 수 있었는지 묻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평양에 보고했더니, 개성시 인민위원회 산하 516 건설기업소에서 지원해 줬습니다. 당이 시키면 우리는 합니다.”

그 한마디 속에 북한 사회의 체계와 단결, 그리고 일사불란한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공단 건설에 수천 명의 북한 노동자가 투입되자, 나는 안전사고 예방 교육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북한 지도원은 흔쾌히 동의하며 “소장 선생이 직접 개성공단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라고 부탁했다.

남한 사람이 현지에서 북한 사람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남북 분단 이후 처음 있는 특별한 일이었다. 긴장과 어색함 속에서 시작된 강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공감과 웃음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묘한 동질감 속에서 서로 박수를 치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브런치 북한근로자교육사진.png

함께 일하던 북한 전문가들과 노동자들은 내가 하는 말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메모하며 귀 기울였다. 그들의 눈빛에는 “언젠가 우리도 남한처럼 잘살게 되길…” 하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마음 깊이 느꼈다. 이곳, 개성공단이야말로 남북이 함께 살아갈 내일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6년 2월 10일, 정치적 이유로 개성공단의 가동이 중단되었다.

그날 이후, 함께 일하던 북한 노동자 5만 4천 명과 남한 관리자 800명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만약 개성공단이 다시 문을 연다면, 우리는 그때처럼 서로의 손을 잡고 웃으며 일할 수 있을까.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의 개성을 기억한다. 분단의 상처 위에 쌓은 돌 하나하나처럼, 개성공단은 우리 민족이 함께 올려 세운 희망의 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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