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위에 머무는 법

딱딱한 세계에 맞서 흔들리며 지속되는 것들에 대하여

by 구시안

그때 나는 런던의 테이트 모던에 서 있었다. 강철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건물의 내부는 예상보다 조용했고, 사람들의 발소리는 바닥에 닿기 직전에 스스로를 낮추는 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긴 복도를 지나 수련이 걸린 방 앞에 섰을 때, 나는 이미 숨을 조금 느리게 쉬고 있었다.


그림은 벽에 걸려 있었지만, 벽에 속해 있지 않았다. 수면은 액자가 아니라 공간으로 이어졌고, 물은 물감이 아니라 시간처럼 번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색은 해체되었고, 멀어지면 다시 호흡을 맞췄다. 붓질은 규칙을 거부한 채 겹쳐 있었고, 그 겹침 속에서 빛은 형태를 잃는 대신 밀도를 얻었다. 연보라와 청록, 흐릿한 녹색과 갑작스러운 흰색의 파편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무엇을 본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다만 보고 있다는 상태에 오래 머물렀다.


방 안의 공기는 묘하게 눅눅했다. 실제 물이 없는데도 물가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의 속삭임은 수면 위를 미끄러지는 바람처럼 흩어졌고,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은 정오가 아닌 오후의 기억에 가까웠다. 그림은 나를 향해 말을 걸지 않았고,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대신 나의 시간을 빼앗아 갔다. 몇 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고, 그 무력함이 오히려 안도감을 주었다. 무엇을 이해해야 한다는 압박이 사라진 자리에서 감각은 제멋대로 떠올랐다. 오래전에 보았던 연못, 물 위에 떨어진 그림자, 바람이 멈춘 순간의 정적. 수련은 꽃이 아니라 표면이었고, 표면은 깊이를 숨기고 있었다. 깊이를 숨기는 방식이 이렇게 정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오래 붙잡았다.


나는 그림 앞에서 내 몸의 위치를 다시 인식했다. 발바닥의 무게, 어깨의 긴장, 손끝의 미세한 떨림. 그림은 나를 안쪽으로 끌어당기지 않았다. 오히려 바깥으로 풀어놓았다. 생각은 느려졌고, 문장은 떠오르다 사라졌다. 이곳에서는 결론이 필요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진행 중이었고, 완성은 미뤄져 있었다. 수련은 계절을 말하지 않았고, 시간대를 고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순간이 아니라 여러 순간의 겹침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앞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떠올렸다. 지금의 나와 예전의 내가 같은 표면 위에 떠 있었다. 서로를 가리지 않고, 서로를 설명하지도 않으면서.


방을 나서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거리는 그림을 다시 묶어 세웠고, 색은 다시 질서를 얻었다. 그러나 그 질서는 교훈이 아니었다. 그것은 허락에 가까웠다.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허락. 테이트 모던의 벽은 여전히 단단했고,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지만, 나는 잠시 세계가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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