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鐵)에 눈이 내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비르하켐에서 에꼴 밀리테르까지, 파리의 겨울
파리에 눈이 내린다. 일 년에 며칠 허락되지 않는, 그래서 더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늘 잿빛 우울을 머금고 있던 파리의 겨울 하늘이 오늘만큼은 눈이 시리도록 하얀 순백색이다.
나는 서둘러 두꺼운 코트를 챙겨 입고 15구의 아파트를 나섰다. 이 도시가 가장 고요해지는 순간을 놓칠 수 없어서였다. 눈발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하는 오후, 나는 비르하켐 다리를 건너 에펠탑을 지나, 샹드마르스의 끝자락까지 설경을 기대하며 걷기로 했다.
1. 비르하켐; 차가운 철골 사이를 걷다
가장 먼저 닿은 곳은 파리 15구와 16구를 잇는 철의 관문, 비르하켐 다리(Pont de Bir-Hakeim)다. 평소라면 덜컹거리는 메트로 6호선의 소음과 웨딩 촬영을 하는 연인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을 이곳이, 오늘은 눈 속에 파묻혀 수도승처럼 고요하다.
나는 이 다리의 철제 기둥들이 만들어내는 엄격한 질서를 사랑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수많은 철 기둥들 사이로 눈발이 사선으로 들이친다. 차갑고 딱딱한 쇠기둥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 길을 걷다 보면, 어지러웠던 마음이 차분하게 정돈되는 기분이 든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흔들림을 겪는가. 마음이 물렁해져서 자꾸만 주저앉고 싶을 때, 나는 이 비르하켐 다리를 걷는다. 단단한 철이 주는 그 서늘한 감각이, 나에게 "다시 척추를 곧게 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2. 에펠탑; 빈틈이 있었기에 무너지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면 거대한 철의 거인, 에펠탑이 나를 맞이한다. 가까이서 본 에펠탑은 멀리서 볼 때의 낭만과는 다르다. 그것은 압도적인 '무게'다. 차가운 쇠와 하얀 눈이 엉겨 붙어 있는 모습을 올려다본다.
1889년, 이 탑이 처음 세워졌을 때 사람들은 "구멍 숭숭 뚫린 흉물"이라며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에펠탑이 무너지지 않고 100년을 버틴 건 그 '빈틈' 덕분이었다. 만약 꽉 막힌 콘크리트 벽이었다면 센 강의 칼바람을 맞서다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에펠탑은 바람이 불면 바람이 지나가게 두고, 눈이 오면 눈이 머물다 가게 두었다.
오늘 찍은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 빈틈마다 하얀 눈이 쌓이니, 흉측하다던 철골은 마치 정교한 레이스 장식처럼 보인다. 어쩌면 우리가 가진 결핍도 그런 게 아닐까. 남들에게 보이기 싫은 나의 빈틈, 나의 약점들. 하지만 인생의 겨울날, 위로가 눈처럼 내려앉을 때 그것을 가장 깊이 품어 안을 수 있는 곳은 바로 그 갈라진 틈새일지 모른다.
3. 샹드마르스; 소란이 사라진 자리, 여백의 미학
에펠탑의 다리 밑을 통과해 샹드마르스(Champ de Mars) 공원으로 들어섰다. 여름날이면 돗자리를 펴고 와인을 마시는 파리지앵들과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던 잔디밭이, 오늘은 거대한 설원(雪原)으로 변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위로 에펠탑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텅 비어 있다는 것은 쓸쓸한 것이 아니라, 가득 찰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소란스러운 말들과 관계에 지쳐있던 나는, 이 광활한 여백 위를 걸으며 비로소 숨을 쉰다.
사각, 사각. 나의 발자국 소리만이 공원을 채운다. 가끔은 인생에도 이런 '강제적 멈춤'이 필요하다. 눈이 내려 세상의 모든 소음을 덮어버린 것처럼, 우리 안의 불안과 조바심도 잠시 덮어두어도 좋다.
4. 에꼴 밀리테르; 뒤를 돌아봐야 보이는 것들
산책의 끝은 공원 맞은편에 위치한 에꼴 밀리테르(École Militaire, 육군사관학교) 앞이다. 나폴레옹이 졸업했다는 이 유서 깊은 건물의 단호하고 고전적인 파사드는, 자유분방한 에펠탑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나는 에꼴 밀리테르를 등지고 서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바로 이곳이 에펠탑을 가장 완벽한 비율로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다. 탑 바로 아래서는 그 압도적인 크기에 눌려 전체를 볼 수 없었고, 샹드마르스를 걸을 때는 눈앞의 눈길을 헤치느라 바빴다. 하지만 공원의 끝까지 걸어와 일정한 '거리(Distance)'를 두고서야, 비로소 에펠탑의 온전한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삶도 그렇지 않은가. 문제의 한복판에 있을 때는 그 크기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땐 차라리 무작정 걸어라. 걷고 또 걸어서, 그 문제로부터 기어이 멀어져라.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겼을 때 뒤를 돌아보면, 나를 죽일 듯이 덤벼들던 고통도 그저 내 인생의 한 장면, 아름다운 풍경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될 테니까.
비르하켐의 차가운 철골에서 시작해, 샹드마르스의 하얀 여백을 지나, 이곳 에꼴 밀리테르의 관조적인 시선에 닿기까지. 오늘의 산책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견뎌라. 빈틈을 내어주고 바람을 흘려보내며. 언젠가 그 자리에도 눈부신 눈꽃이 필 테니.
파리의 겨울이 깊어간다. 당신의 겨울도 묵묵히, 그리고 아름답게 깊어가기를 바란다.
[Prochaine] 다음에는 850년 역사가 화마에 무너지던 밤, 파리지앵들이 눈물로 불렀던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노래를 찾아갑니다. 꼽추 콰지모도의 비극적 사랑이 서린 곳이자, 폐허가 된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회복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