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친구들과 재미 삼아 사주를 보러 갔다.
사주를 봐주신 분은 내 생년월일을 입력하더니 이렇게 얘기했다.
"어린 시절이 서리로 가득 껴있어요. 이 정도면 유년시절에 어디가 많이 아팠거나 집안이 망했거나예요."
사주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저 말은 맞았다.
답은 후자였다. 집안이 망한 쪽.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슬슬 가정형편이 어려워졌다.
첫 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평소 물욕이 없는 나인데, 그때 당시 유행하던 구슬 목걸이를 엄마에게 사달라고 말했다. 알록달록한 큰 구슬이 전체 다 둘러져있는, 지금 생각하면 매우 촌스러운 목걸이다.
엄마는 빨래를 널며 말했다. 날 쳐다보지 않은 채로.
"엄마가 지금은 돈이 없어. 나희야."
그때 우리 가정의 형편이 여유롭지 않다는 걸 처음 느꼈다. '구슬 목걸이는 고작 500원이었는데.'
중학교에는 가난이 절정에 달했다.
내가 기억하는 중학생 시절의 장면은
돈 벌러 지방에 가신 아빠가 한 달 만에 얼굴이 까맣게 타서 돌아오신 모습,
길에서 만난 엄마를 아무리 크게 불러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엄마의 모습, 무한도전을 봐도 정말 단 한 번도 웃지 않으셨던 모습,
학원비가 밀려 학원을 그만둔 언니가 쓸쓸히 방에 앉아있던 뒷모습이다.
그리고 가장 강렬한 기억이 하나 더 있다.
하루는 엄마와 내가 단둘이 집에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네다섯명의 아저씨들이 몰려와서 문을 두드렸다.
엄마는 내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나와 엄마는 끌어안은 채 숨죽여 기다렸다.
소리가 잠잠해지는 듯싶었다.
잠시 뒤, 현관문 아래쪽에 있는 우유 넣는 구멍으로 어떤 기구가 들어왔다.
그 기구는 길게 위로 뻗어 나갔고 잠겨 있는 자물쇠를 돌려 풀었다.
문이 열렸다.
건장한 아저씨들이 들어왔다.
엄마에게 문을 왜 안 열었냐고 소리쳤다.
우리 집에 있는 모든 물건들에 빨간딱지를 붙였다.
티비에서 보던 장면과 같았다.
이제 안방에 붙일 차례였다.
나는 두 팔을 벌려 안방 문을 막아섰다.
나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한 아저씨가 내 팔을 내리며 말했다.
"미안하다 얘야"
안방까지 빨간딱지로 점령됐다.
그다음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아 우리 집은 가난하구나.'
'돈이 있어야 하는구나.'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어렸을 적부터 현실적인 나는 가난을 타개하려고 노력했다. 슬퍼하고 부끄러워하기보단 해결책을 생각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중학교 1학년 때, 급식 반장 신청을 했다.
급식 반장이 하는 일은 반 아이들에게 급식을 배식해주고 나서 제일 마지막에 밥을 먹는 건데 급식비를 면제해 준다. 심지어 배식하고 남은 반찬을 일회용 봉투에 싸서 갈 수도 있었다. 우리 가족의 저녁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날 담임 선생님께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나희가 급식 반장을 신청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운 지 물었다고 한다. 담임 선생님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물은 걸 수도 있는데, 엄마는 그날 엄청 울었다고 한다. 어린 딸에게 짐을 지어준 것 같아서.
내 기억에는 없는, 엄마가 전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집에 라면이 딱 하나만 남아있어서 엄마와 나, 언니 셋이서 나눠먹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동생은 그때 어디 갔던 건지 모르겠다.
엄마가 말하길, 내가 "조금씩 나눠 먹으니까 진짜 더 맛있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감질나게 먹으니 진짜 맛있어서 그렇게 말한 걸 수도 있는데, 자식에게 그 자체로 죄인인 가난한 부모는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우리 집 형편은 나아지질 않았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고팠다. 가난은 공부에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물론 학원은 못 다녔다. 고등학교 3학년인 친언니조차 학원을 못 다녔는데 나는 더더욱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았다. 전교 1등을 했다.
학교에서 운영비를 면제해 줬다. 어디선가 장학금도 조금 받았던 것 같다.
그 돈으로 학년으로 7살 차이가 나는 동생(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에게 플루트를 사줬다. 학교 방과 후 과정에서 필요한 물품이었다. 책상도 사줬다. 아빠 건강검진 비용도 대 드렸다. 아빠는 그때 딸 덕분에 대장내시경에서 용종을 발견해서 제거한 이야기를 아직도 하신다.
공부를 하니, 돈이 생겼다.
공부를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엄마 아빠에게 삶의 희망이 생겼다.
엄마가 활짝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
나는 이 지긋지긋하고 지독한 가난에 한 줄기 빛이 되었다.
나는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결핍은 나를 성장시켰고, 나를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가족애도 더욱 끈끈해졌다.
그런데, 내가 느꼈던 이 결핍과 불안이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그 상처는 곪고 곪아서 이후의 내 삶까지 옮겨 붙었다.
나는 안정적인 삶을 절박하게 갈구했다.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로스쿨 입시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 다시 도전하고 싶었지만 무서웠다.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작 스물 세 살이었는데.
20대 후반에는 교육 대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직장을 그만둘 수 없었다. 돈이 잠시라도 끊기는 삶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직장과 병행했다. 주경야독하면서.
안정적인 삶에 대한 집착적인 갈구는 계속 나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꿈을 향해 쫓아가고 싶어도,
불안함은 한 구석에 접어두고 싶어도
그러질 못 하게 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날고 싶지만 날기 두려운 나'로 살아왔다.
이 양가적인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며 결국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시간이 이끄는 대로 현상유지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