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물을 준 자를 잊은 적 없다

수능철이면 떠오르는 나의 은사님께

by 한냥이

'나무는 물을 준 자를 잊은 적 없다'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내 머릿속에는 바로 고등학교 은사님이 생각났다.

고3 때 나의 담임이었던, 근현대사 과목을 가르치던 남자 선생님이셨다.


단순히 말하자면, 선생님은 무섭지만 따뜻한 분이셨다. 남고에만 근무하시다, 여고에 첫 부임하셔서 여학생들의 천진난만함과 똘끼 그 사이에서 당혹스러워하셨던 모습이 기억에 난다.


2008년 당시 가수 비의 노래 <Rainism>이 유행이었고, 3학년 1반 우리들은 선생님의 함자에 있는 '호'를 따다가 Hodism이라고 불렀다. 참 여고생다운 발상이었다.


선생님은 자신을 '애비'라고 부르셨다. 걸걸한 목소리와 퉁명스러운 말투로 "애비 속 썩이지 말아라" 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지난한 고3 수험기간을 잘 견디고 있던 나는 수시 원서 접수를 하던 9월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대학교에 제출할 나의 자기소개서를 학교의 국어 선생님, 학년 부장 선생님, 심지어 교장 선생님께서 고쳐댔다. 그들은 나의 어눌한 표현들을 고급지게 포장했다. 나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에 등장하는 '빨간딱지'는 '적찰'이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입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의도였지만, 난 그저 진솔하게 나의 이야기를 내 언어로 담고 싶었다.


지금은 사소해 보이지만 그 당시엔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상황이, 이 학교라는 공간이 너무 답답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5교시 작문 수업을 째고 학교 밖으로 나갔다. 무단 외출을 강행한 것이다.


핸드폰을 껐다. 갈 곳 없는 나는 집으로 갔다.

컴퓨터를 켰다. 벅스에서 럼블피쉬의 <으랏차차> 노래를 틀었다. 그리고 소리 질러 따라 불렀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정신이 들었다.

냉장고를 열어 요구르트를 챙겼다. 반 친구들에게 나눠주려고.

용기가 없어 핸드폰을 켜지 못한 채로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 정문을 지나는데 3학년 1반 교실 창문에 친구들이 매달려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친구들이 "알파카!" 하면서 나를 부른다. (내 별명이 알파카였다. 진짜 알파카를 닮아서.)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요구르트 봉지를 흔들어 보여주었다.


교실에 도착했다. 친구들은 "알파카! 너 큰일 났어!"라며 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했다.

교실에는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셨고 교무실로 따라오라고 하셨다.

교무실에 갔다. 선생님은 한숨을 푹 쉬며 딱 한 마디를 하셨다.

"다시는 애비 실망시키지 말아라."


그 후, 교장실에도 불려 갔다. 깨끗했던 생활기록부에 '무단 외출' 한 줄이 기록되는 것은 입시에 치명적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엄마를 학교에 모시고 오라고 했다. 이미 교장 선생님은 엄마께 직접 전화를 드린 상태였다. 학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나의 1시간짜리 일탈은 학교에서 큰 이슈였고, 결국 현실로의 복귀로 막을 내렸다.


며칠 뒤,

나의 담임 선생님은 가 처음에 썼던 그 자기소개서를 다시 가지고 오셨다. 그리고 이 글로 원서를 내자고 하셨다. 서툴고 어색한 문장들이 더 너답다고, 그래서 자기는 더 좋다고 하셨다.

그렇게 내 편이 되어주셨다.




성인이 되고 간간히 선생님이 떠올랐다.

난 5월에 있는 스승의 날 보다 오히려 날씨 쌀쌀해지는 11월에 선생님 생각이 났다.

아마도 이 시기가 수능 시즌이어서 그런 것 같다.

쌀쌀하지만 춥지 않은 온도, 긴장되는 공기 속에서 내 삶의 첫 도전이었던 수능철이 찾아올 때면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수능 전날 누구보다 긴장감이 역력한 모습으로 우리를 독려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긴장하지 말라고, 그동안 고생했다는 그 말 한마디에 우리는 울었다. 참고로 난 울지 않고 눈물을 삼켰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애비'였고, 평소 차가웠던 애비의 긴장 어린 격려와 응원은 안하고 두려웠던 우리의 마음을 녹였다.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나도 내 인생을 사느라 선생님 연락을 자주 드리진 못 했다. 이미 이런 시나리오를 예상하셨던 선생님은 고등학교 졸업식 때 엉엉 울면서 자주 찾아뵙겠다고 말하는 우리들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지배들은 결혼하면 끝이야. 그래도 애비 가끔 생각나면 연락해. 그거면 돼."


그리고 선생님은 핸드폰 번호를 바꾸지 않으셨다.

언젠가 올 제자의 연락을 기다리며.


바로 어제,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또 선생님을 떠올리게 했다. 메신저를 켰다. 지난 기록을 보니, 작년에도 11월에 연락을 드렸었다.


어색하지만 용기를 내어 메시지를 드렸다.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전화를 하셨다.

15년 전과 똑같은 목소리였다.

"어어 나희~ 잘 지내지? 복직은 했고?"


그냥 잘 지낸다고 대답하기에는 지난 1년 간의 힘든 투병 기간이 있었다.

"아 선생님. 저 사실은..."

덤덤하게 내 상황을 말하려고 했는데, 엉엉 울어버렸다.

부모님 앞에서도 울어본 적이 없는데 왜였을까?

나의 담임 선생님 앞에서 나는 다시 고3 여고생이 된 것마냥 목놓아 울었다.


나에게 떠올릴 스승님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그리고 연락드릴 수 있는 스승님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에게 물을 준 그분을 잊을 수 없다.

날 자라게 한 그분께,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그분께 감사와 존경을 표현다.





작가의 이전글우연과 우연을 이어 가족이 되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