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는 도덕 선생의 존재가 컸었다. 이건 안 된다, 저건 해야 한다며 늘 바른말만 하는 도덕 선생. 내 안의 도덕 선생은 도덕적인 나를 강요했을 뿐 아니라, 타인이 하는 잘못된 행동을 내가 비난하게 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면 한 번의 분노로 끝날 수 있지만, 가까운 관계일수록 분노는 오래 지속됐다. 내 인생인지 그의 인생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다 내 안의 도덕 선생 목소리가 작아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잘난척하는 모습이 싫어서 누군가를 크게 미워한 적이 있는데, 현실에선 말할 수 없어 상상 속에서만 분노했다. 나의 소중한 하루와 생각의 에너지가 이렇게 소모되는 것에 화가 나서, 이 미움이 왜 필요한지 묻고 또 물었다.
잘난척하던 그의 행위는 곧 내 것이었다. 겸양의 미덕을 강조한 내면의 도덕 선생 때문에 나 스스로 억누르고 있던 행동을 보인 그를 흉보고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나를 향해 비난한 것과 같았다. 이것을 인정하려니 구더기가 내 피부를 스멀거리는 것 같은 불쾌감이 일었다. 고개를 저어가며 거부했으나, 인정하자 분노의 낭비는 멈췄다. 오히려 나를 혐오하던 그 고통을 넘어서니 쾌감마저 밀려왔다.
정여울은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심리 수업 365』에서 자기혐오는 문명화 이후의 증상이라고 말했다. 자기혐오는 너무 많은 비교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잃은 현대인의 고질병이 되어간다고 했다. 이러한 자기혐오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에고’, 즉 사회적 자아에 의해 일어난 것이므로 자신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자기혐오는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융의 언어로 표현해 보면 인간에게는 자신의 어두운 면인 그림자가 있고, 인간은 이 그림자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가면(페르소나) 뒤에 잘 숨는다. 하지만 진정한 자기(self)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림자와 대면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쾌감을 느꼈던 자기혐오는 도덕 선생(에고)이 거부했던 내 그림자와의 치열한 전투 과정이었고, 상대를 혐오하는 마음이 멈춘 것은 그림자의 존재를 받아들였기에 상대에게서 투사하는 것을 멈춘 것이다. 그림자의 수용으로 통합된 새로운 자아는 더이상 자신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는 인간의 끊임없는 혐오 행위에 대해 소개한다. 우정, 책, 그림에 대한 사랑이 영원할 것 같지만 금세 싫증을 내며, ‘혐오만이 죽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런 인간성을 잘 알면서도 사랑과 우정에 우롱당해 낙담한 자신을 혐오할 수밖에 없지 않냐고 반문한다. 인간이 뒷담화의 종족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을 혐오하는 것조차 즐겁다고 하는 생각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저자의 모습이 아름다웠고, 자기혐오 속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자기혐오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평가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기 이해가 잘 된 사람이다. 누구나 자기를 이해하고 있는 줄 알지만 사실 가장 알 수 없는 것이 자기 자신이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내가 왜 슬픈지, 그 근원을 잘 몰라 우리는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할 때가 종종 있지 않은가?
리지아 보중가 누니스의 『노랑 가방』에서 10대 소녀 라켈은 자신의 욕망을 경멸하여 욕망을 가둘 장소를 찾는다. 라켈은 이웃에게 선물 받은 노랑 가방에 욕망을 숨기지만, 꼭꼭 눌러 둘수록 욕망은 더욱 커져 가방이 부풀어 오른다. 이는 욕망은 결코 숨길 수 없음을 말해 준다. 내 욕망이 도덕 선생의 훈육이라는 방식으로 엉뚱하게 드러난 것처럼 말이다. 라켈은 욕망을 가진 상상 속의 친구들과 서로의 욕망을 이야기하며 문제를 해결해 간다. 욕망의 근원을 이해하게 되자, 라켈은 가방 속의 욕망을 모두 펼쳐낼 수 있었다. 사회적 규율의 억압으로 생긴 욕망은 날려 보내고, 내적 욕망인 글쓰기는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껏 표현하기로 한다. 라켈은 자기 그림자와 대면하여 보내 버릴 욕망과 취해야 할 욕망을 잘 구분해 건강한 자신을 다시 만난다.
나는 아이들과 책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이 좀 더 건강한 자기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기에, 인위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준다. 아이들에게는 습관화된 겸손의 자세를 가진 경우가 많다. 스스로 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자기 만족감이며 자기 존중인데, 타인이 이를 어떻게 평가할지 두려워서 자신의 뿌듯함을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앤드루 클레먼츠의 『잘난 척쟁이 경시대회』라는 책을 할 때 도입 활동으로 ‘잘난 척 대회’의 장을 마련했다. 다소 과장되게 연극적 요소를 넣어서 표현하기 때문에 비난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외향적인 아이들이 먼저 표현하면 내향적인 아이들도 용기를 낸다. 끝나고 나서 어떤 기분이 드는지 글로 써 보았는데, 내가 놀랐던 건 내향적인 아이들 대부분이 속이 시원하다고 쓰는 경우가 많았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표현하는 것이 두려웠다고 한다.
욕망을 가둔 사람은 나만 사랑한다. 이런 이기적인 자기애는 타인을 혐오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진정 사랑하면 자기혐오의 과정을 거쳐 건전하고 확장된 자신을 만날 수 있다. 타인의 혐오보다 성찰적 자기혐오로 세상 사람들을 좀 더 사랑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