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페르하에허
파울 페르하에허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는 미국의 엔론 스캔들을 단지 하나의 회계 범죄가 아니라, 조직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의 추악함이 드러난 상징적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엔론은 매년 직원을 성과 순으로 줄 세우고, 하위 10%를 해고했습니다.
경쟁과 효율만 남은 구조 속에서 사람은 서로를 짓밟아야 살아남을 수밖에 없죠.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특정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제는 학교, 병원, 정부, 심지어 친구 관계까지도 성과와 비교라는 렌즈로 설명되기도 하죠. 존재 그 자체는 무게를 잃고, 사람은 무엇을 해냈는가에 따라 판단됩니다.
페르하에허는 이 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불안에 시달리며, 그 과정에서 점점 괴물처럼 변해간다고 경고합니다.
페르하에허는 또 다른 저서 <정체성과 권위>에서,
정체성은 타인의 시선과 응답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 사회적 응답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구성한다는 것인데요. 하지만 지금 이 응답은 건강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권위는 무너졌고, 규범은 혼란스럽습니다. 사회는 오직 성과만 말하고 존재보다는 퍼포먼스가 우선시 되고, 사람은 끊임없이 ‘되려고’ 애씁니다. 그 결과, <엔론 사회>가 보여주는 ‘성과로 환원된 인간’은, <정체성과 권위>가 말하는 ‘응답을 잃은 인간’이 탄생하는 사회적 조건을 보여줍니다. 두 책은 서로 다른 길을 통해 같은 현실을 조명합니다.
이 글들을 읽고 든 내 감정과 거리감
파울 페르하에허의 글을 읽으면서 이상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그의 문제의식이 나와 동떨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꽤 많은 부분에 동의합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툴툴거리게 됩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된 호기심과 환희의 느낌이 아닌, 덮어둔 문제를 직면하여 괴로운 느낌에 가까울까요?
아마도 그가 말하는 구조와 진단이 논리적이라서 도망치고 싶던 현실을 정면으로 들이대는 느낌 때문에 숨이 막히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정체성은 응답받는 관계 속에서 형성됩니다. 하지만 지금 그 관계(권위, 공동체, 규범)는 붕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체성의 불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입니다.
사회가 무너졌기 때문에 개인의 정체성이 혼란에 빠졌고, 공동체가 회복되어야 개인의 정체성도 회복될 수 있다고 합니다. 동의됩니다. 하지만 구조를 ‘사회’라는 추상어로만 지적하면 대안이 되지 않다고 봅니다.
사회는 얼굴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회라는 추상적 대상은 공허합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거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사회로 책임을 돌리면 오히려 사람의 이야기가 사라지는 게 아닌가 조바심이 나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나도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혼란스럽네요. 그래서 반동심이 나나 봅니다. 대안 없는 비판을 해야 하는 너와 내가 한심해서 –
문득 최근 국민대 경영대학원 김성준 교수님이 말한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우리는 사람을 너무 쉽게 ‘역량’이라는 렌즈로만 본다” 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역량을 가졌는지, 숫자로 얼마의 성과를 냈는지를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건 무척 편리하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놓치게 만든다고 합니다. 사람은 숫자가 아니고, 어떤 문맥 속에서 일하고 살아가는지를 같이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기업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요? 사실 이것도 이해됩니다. 조직은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모든 걸 정성적으로 판단하긴 어렵겠죠. 책임질 결과가 있고, 외부 투자자와 성과 압박이 있고, 시스템은 감정을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관리'하고 '통제'하는 관계에 머물러버리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 구조가 우리를 병들게 했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요?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주춤했고, 아직은 답할 수 없는 상태로 머무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