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깨닫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

거기 잠시만...

by 이건

동사무소에 갔다.

도장이 필요해서 도장을 가져왔는데 주머니 속에

도장이 없었다. 전날 밤을 새우고 피곤했던 탓에

아차 싶었다.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끝의 감각으로

만져보았는데, 도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손 끝에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집으로 가서 도장을

찾아보았으나 도장 비슷한 것도 내 책상에는

남아있질 않았다.


결국 도장을 다시 파서 동사무소로 가

서류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다. 그렇게 그해

겨울이 지났고, 다음 해 겨울 옷정리를 위해

다시 꺼내놓은 옷 안에 무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볼펜 2자루, 카드 1개, 립밤 1개, 껌 1개, 그리고 도장 두 개....


문득 지난 겨울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분명 도장은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내가 없다고 결론을 내버린 거였다.

꺼내놓고 보기 전까지 나는 그것이 내 코트 주머니에

없다고 여긴 것이다. 단지 손끝의 감각만을 믿고...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감촉이 동시에 들어 ‘착오’

를 일으킨 것이었다. 도장을 립밤이나 볼펜이라고

여겼을게 분명했다.


우리가 가진 감정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날 도장이 없다고 믿었고,

없다고 결론을 내린 순간부터

그건 정말로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사실은, 내 손끝이 그것을 ‘다른 것’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감정도 그런 착각을 일으킬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미움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이

사실은 너무 사랑해서 생긴 서운함이었을 수도 있고,

무관심이라고 믿었던 마음이

사실은 너무 오래 기다려 지쳐버린 그리움이었을 수도 있다.

두려움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한 마음일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을 손끝으로만 느끼고,

그 모양과 질감을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이건 분명 화야’, ‘이건 슬픔이야’ 하고 단정 지어버린다.

그래서 종종 진짜 감정은 그 안쪽 깊은 곳에

잘못된 이름으로 묻혀버린다.


나는 때때로 내 마음을 만져본다.

어떤 건 분명 분노 같고,

어떤 건 확실히 외로움 같고,

또 어떤 건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의 혼합물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모든 감정의 밑바닥에는 공통적으로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미워서 떠난 게 아니라,

더는 다가설 용기가 없어서 떠났던 일들.

화가 나서 던진 말이 아니라,

사실은 상처받을까 봐 먼저 방어했던 말들.

그 모든 순간이 착각의 변주였다.


도장이 없다고 믿었던 그날의 나처럼,

나는 내 안의 어떤 감정들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던 것 같다.

사실은 그 감정이 살아 있었는데,

내가 손끝으로만 판단해 ‘다른 이름’을 붙여버린 거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려 한다.

감정이 올라올 때,

그걸 바로 ‘슬픔이다’, ‘분노다’, ‘사랑이다’ 하고 재단하지 않으려 한다.

그 대신 이렇게 속삭여본다.


“너는 누구니?

내가 너를 제대로 본 적이 있었을까?”

어떤 감정들은 이름 없는 혼혈아처럼 존재할 터였다.

그 아이들에게 이름을 뭐라고 붙여줘야 할지 고민이다.

그렇게 천천히 되새기고 만져보면,

때로는 미움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기도 하고,

분노 속에서 슬픔을,

체념 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날 잃어버린 도장이 사실은 내 코트 주머니 안에 있었듯이,

내가 잃었다고 믿은 감정들도

아직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단지, 그 감촉을 내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감정은 종종 착각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착각조차도

결국은 우리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닐까.

손끝으로 느끼는 감정이

조금은 다르게 해석되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감정을 다시 꺼내보려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의뢰가 들어왔다. 먼 미국에서...

오늘도 누군가 그 의지를 삶의 막바지에

용기 있게 꺼내 놓은 사람이었다.

내가 도장을 찾은 것처럼, 그때의 감정을 담은 마음을

이제야 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에

고백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었다.


긴장되고 초조하다.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후회와 죄책감은 다음 해 겨울 내가 발견한 도장처럼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이름을 잃고 떠돌 뿐이다.”


“가장 늦게 꺼낸 말이, 사실은 평생 품고 있던 진심일 때가 있다.”


“시간은 모든 걸 지우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다시 만져볼 때까지 잠시 덮어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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