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전하는 선끝의 무게
이따금 의뢰를 받으면
가끔은 살아 있는 사람만 상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술술 풀리는 일도 있다. 그러다가 날벼락처럼 생기는 일이 있는데,
실컷 찾아놓고 됐다 싶으면 이미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되는 경우다.
어떤 날은 도망친 사람을 찾고,
어떤 날은 의심스러운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일은
진실이 아니라 ‘사실’을 알려야 할 때다.
특히, 이미 돌아가신 사람의 소식을 전해야 할 때.
나는 그 순간마다 손가락이 멈춘다.
문자 한 줄이면 될 일인데,
그 한 줄이 한 사람의 세상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때때로 연세가 지긋하시거나
삶의 향이 어느정도 예상되는 경우
미리 돌아가셨을 수도 있을거라는 언지를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전화로 말하기에는 전화기 넘어 순간의
멈춤을 감당해낼 제간도 없다.
“안타깝게도, ○○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문장을 쓰기 전, 나는 늘 오래 망설인다.
단어 하나, 문장 부호 하나에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글을 배운 이유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걸.
한번은 누군가가 아무런 감정없이
“00님 돌아가셨네요. 라고만 보낸 문자에
극대노를 한적도 있었다.
“너는 니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그렇게 보낼거냐?
라고 말하면서...
그 이후로 나는 보고서나 전화통보 대신 ‘편지처럼’ 쓰기 시작했다.
차가운 사실 앞에서도,
조금이라도 인간의 온기를 남기기 위해서.
“찾았습니다.”라는 문장을 쓸 때마다
그 뒤에 생략된 수많은 말들이 내 마음을 건드린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조금만 더 빨리 찾았더라면…”
그 말들을 문장 속에 넣을 수 없으니,
나는 대신 문장의 호흡으로 남긴다.
그 일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글을 쓰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어떤 문장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어떤 문장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 이후부터
세상의 모든 문장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짧은 문자,
뉴스 자막,
길거리의 안내문 하나에도
누군가의 숨결이 숨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지금도 문자를 보내기 전,
나는 늘 한 번 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아주 짧게 기도한다.
“이 문장이 누군가에게
세상의 끝이 아니라,
조용한 작별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