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위한 점검
의뢰를 받다보면 저마다 사연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연들은 저마다 시간이라는 과거에
묻혀 오랜시간 다시 시멘트 사이를 뚫고 나오는 식물들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도록 그렇게 누군가를 찾는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은
“미안함” 이 묻어 있다.
처음에는 괜찮을거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리고 실제로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것처럼 여긴다.
사실 그것은 잊혀진 것이 아닌 삶에 집중한 시간동안
잠시 잊은 것 뿐이다.
그리고 이제 삶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당연히 떠오르는
누군가가 생겨난다. 외면했고, 모른척해야만 했던
당시의 상황들 속에서 억지로 참아야만 했던
감정들이 그렇게 마음 어딘가에서 자라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
“미안해” 라는 말이다.
몇 년전부터 명상을 배웠다. 그 한마디의 싹이
넝쿨처럼 자라나서 더 이상 마음속이 아닌 밖으로
뻗어나오면 찾는 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동안 수천번 수만번을 곱씹으며 정리된
그에 대한 생각과 자신의 마음이 정리되어진 사연을
말한다. 일을 하다보면 간접트라우마를 겪는 경우가 많아서
스스로의 에너지가 다운 될 때가 있다.
명상에서
미안함은 “죄책감”과 연결된다. “죄책감”은 인간을
가장 낮은 상태의 에너지로 만든다고 배웠다.
우리는 평생 어떠한 죄의식을
마음속에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애써 그것을 잊으려 애쓴다.
하지만 죄책감은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을 맴돈다.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냉소로,
또 어떤 날엔 ‘괜찮은 척’이라는 이름으로.
그건 마치 스스로를 지키려 만든 방어막이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옳아매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의뢰를 받으며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다.
대부분은 나이가 들어 삶이라는 기로에서
언제가 될지 모를 죽음을 맞이하기전의 홀가분함을
느끼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달라는 의뢰인들,
그들이 진짜 찾고 싶었던 건 사람이라기보다
‘그때의 자신’이었다.
용서하지 못한 나,
놓아주지 못한 나,
그 미안함에 갇혀 여전히 어제에 머물러 있는 나 말이다.
그래서 명상에서 말하는 ‘용서’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을 다시 사랑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죄책감은 죄의 무게보다 오래 남는다.
하지만 그 무게를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인간은 다시 ‘지금’에 설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를 찾는다는 건 결국,
시간 속에 잃어버린 ‘나 자신’을 되찾는 일인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