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에게 무엇이었나요?
우리 아버지는 나를 아주, 아주 사랑했다.
얼마나 사랑했냐고?
내가 서른이 다 되어 옷을 사오면
“그게 뭐냐! 이건 색이 죽었다!” 하시며
직접 옷가게에 동행하셨다.
결국 아버지의 손끝에서 선택된 것은…
가슴팍에 큼지막한 곰돌이가 웃고 있는 노란색 후드티.
참고로, 그 다음 날은 내 면접 날이었다.
아버지는 머리에도 엄격했다.
내가 미용실에서 돌아오면
먼저 내 머리를 쓱 훑어보고,
그 다음엔 서랍을 열어 가위를 찾았다.
입대 문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면제 사유가 있었던 나에게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는 군대를 가야 한다!
바보 같은 놈들도 다 버티는데 네가 왜 못 버티냐!”
그래서 갔다.
그 ‘바보 같은 놈들’ 속으로.
그리고 진짜 바보처럼 버텼다.
제대 후 삼촌에게 들었다.
우리 아버지, 현역시절 사고치고
간신히 군생활 마친 방위 출신이었다.
그 순간 느꼈다.
“아.....
군대를 제대하고, 나는 유학을 준비했다.
비행기 표도 끊었고, 꿈도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출국 며칠 전, 아버지의 ‘긴급 제보’가 날아왔다.
“요즘 외국에 전염병 돈다!
비행기 추락도 많고, 거기선 마약만 있어도 사형이다!”
그날 이후 나는 공항 근처도 못 갔다.
아버지의 정보망은 국정원급이었다.
이후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 뉴스는 5년 전 기사였다.
그 후로 세월이 흘렀다.
나는 마흔을 넘겼다.
아버지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나는 내 세월의 일부를 잃었고,
아버지는 나를 붙잡느라 자신의 세월을 잃었다.
그리고 몇 해 전, 전설의 전화가 왔다.
“엄마가 식당 하는데… 니가 같이 해라.”
그때 나는 박사과정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버지… 전 지금 논문 써요.”
“그런거 따서 뭐하려고? 그냥 식당이나 해라.”
그 말에 내 안의 곰돌이가 드디어 폭발했다.
“아버지!
제 인생이 밥은 안 먹여도,
이제는 제가 먹여야 합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냥 헛웃음만 났다.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사랑했고,
그 사랑은 여전히 내 인생을 ‘함께’ 살고 있었다.
문득 깨달았다.
“아, 우리는 샴쌍둥이였다.”
아버지의 걱정이 내 숨통을 조이고,
내 한숨이 아버지의 가슴을 누르며
서로의 삶을 같이 질질 끌고 다닌 거다.
이제 나는 안다.
타인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동업이다.
게다가 이 동업은 늘 적자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제 그만, 합병 종료.”
사랑은 붙어 사는 게 아니라,
서로의 거리에서 자라는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