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언어, 뭐라고??

by 김봉춘

금융언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넘겨야 할 서류는 아직 서너 장이 남았고,

창구 너머로 들려오는 대기 번호 호출 소리는 조급함을 재촉한다.

볼펜 끝이 서류 위를 바쁘게 옮겨 다닐 때마다, 나는 기계처럼 훈련된 문장을 뱉어낸다.

“적합성 원칙에 따라 고객님의 투자성향을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내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하지만, 동시에 공허하다.

뒤이어지는 ‘고난도 금융투자상품’이니 ‘원금 손실 가능성’이니 하는 단어들은 공기를 부유하다 고객의 귀 근처에서 흩어진다.

고객은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마치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서류 구석구석 ‘설명 듣고 이해하였음'이라는 글자를 따라 쓴다.

마침내 마지막 서명이 끝나고 펜이 책상 위에 놓이는 순간, 정적을 깨고 고객이 묻는다.

마치 앞선 30분의 설명이 없었던 일이라는 듯,

가장 원초적인 표정으로.

“그래서… 제 돈은 괜찮은 건가요?”

그 짧은 질문 앞에서 나는 깨닫는다.

방금까지 내가 수행한 것은 ‘소통’이 아니라 완벽한 ‘방어’였음을.




'안전한 문장'이라는 성벽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은 분명 선의에서 출발했다.

고객에게 상품의 본질을 알리고,

부당한 권유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라는 것이다.


금융의 말이 어려워진 것은

법과 분쟁의 경계 안에서 책임의 언어로 설명해야 하는 구조 때문이다.

감독 기구는 현장에서 적용하기 모호한 지침과 규정을 내리고

서류와 녹취로 엄격히 감시한다.

현장의 언어는 이 '보호'의 의지를 착실히 따르려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뒤틀려버린다.

“부적합 상품에 대한 투자 권유는 제한됩니다.”

“설명 의무 이행을 위해 해당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문장들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법령과 규정에 가장 충실한 표현들이다.

금융회사가 이 딱딱한 문구들을 고수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문장을 '고객의 말'로 바꾸는 순간, 법적 의미가 희석될 위험이 생기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책임소재로부터 조직을 방어하기 위해, 금융은 가장 차갑고 견고한 '안전한 문장' 뒤로 숨어버린다.

결국 금융의 언어는 점점 더 정교해지고 판매프로세스는 복잡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객보호에서는 멀어지고 있다.


프로세스가 삼켜버린 본질

문제가 터지면 우리는 늘 익숙한 진단을 내놓는다.

내부통제가 미흡했다거나,

판매 프로세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식이다.

물론 시스템은 중요하다.

하지만 상담 창구에서 고객의 막막한 눈빛을 마주하다 보면 근본적인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정말 문제는 프로세스일까.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언어’ 자체는 아닐까.


고객이 알고 싶은 본질은 지극히 단순하다.

'이 상품이 정확히 무엇인지',

'내 소중한 돈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이 위험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지'다.


우리는 고객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수십 페이지의 약관과 설명서를 들이밀지만,

정작 고객이 그 거대한 정보의 파도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방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금융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금융을 설명하는 우리의 태도가 거대한 장벽이었던 셈이다.


“지금의 금융 언어는, 대체 누구를 위한 말인가?”

녹취기 앞에서 기계적으로 스크립트를 읽어야 하는 영업직원도,

면피를 위한 문장을 고심하며 만드는 본사 직원도,

그리고 그 설명을 듣고 불안하게 서명하는 고객도.


그 누구를 위한 말도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자명해 보인다.

이제는 '규정의 언어'를 '이해의 언어'로 번역해야 할 때다.

보호의 본질은 서류의 완결성이 아니라, 고객의 고개를 진정으로 끄덕이게 만드는 이해에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