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마무리하는 2025년 8월 22일 지금 넷플릭스 영화 전 세계 주간 시청 1위는 지난주까지 전 세계 시청 횟수 21억 회를 넘긴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미국 만화영화이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기본 대사는 영어이고, 우리말을 비롯한 여러 언어로 더빙되어 있다. 다만 특이하게 등장인물과 공간 배경은 한국인과 우리나라다. 이 영화는 2025년 6월 20일 공개되었는데, 우리나라 아이돌이 주인공인, 그리고 케이팝을 활용한 최초의 뮤지컬 만화영화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줄여서 ‘케데헌’이라고 하며, 영미권에선 ‘KPDH’ 또는 ‘KDH’라고 줄여 부른다. 이 영화에 들어 있는 노래들이 매우 인기가 있어서 빌보드 핫100에 9곡이나 들어갔다. 주변에서도 하도 많이 들려서인지 필자 또한 주제곡인 ‘골든’을 흥얼거리곤 한다.
우리 가요나 가수의 빌보드 상위권 입성은 싸이,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을 통해 이미 익숙한 일이 되었는데, 한 영화의 삽입곡들 거의 전부가 이런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우스개로 김구 선생이 ‘이제 나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합성 이미지를 올리곤 한다. 이쯤에서 필자는 어쩔 수 없는 ‘국뽕’을 느껴 역시 속물이라고 자책하기도 한다.
아직 보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결말은 빼고 간단히 영화의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케이팝 걸그룹 일원인 루미, 미라, 조이 세 사람은 실은 초능력을 지닌 퇴마사이기도 해서, 악귀가 사람들의 혼을 빨아들여 세상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무력화하고 영원히 악령을 막는 황금 혼문(魂門)을 완성하려고 노력한다. 그 와중에 ‘사자보이즈’라는 악령이 변신한 보이그룹이 나타나고, 노래 대결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제목의 유치함이나 ‘이 나이에 만화 보랴’라는 꼰대 의식으로 처음에는 외면했었던 이 영화를 오늘의 이야깃감으로 택한 것은 다름 아닌 ‘격세지감’ 때문이다. 바로 이 영화에 들어 있는 케이팝 9곡 가운데 주제곡인 '골든'을 비롯한 모두 6곡의 가사에서 그렇다. 이 영화를 위해 새로 창작된 곡은 모두 8곡인데, 이 가운데 2곡은 가사 전체가 영어로 되어 있다. 다른 6곡의 가사를 접하고 든 생각을 이 글에서 풀어보려 한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역사는 1923년 발매된 ‘이 풍진 세월’(광복 후 ‘희망가’로 불림)로부터 시작되고 ‘사의 찬미’(1926년)로 불붙었다는 것이 학계 정설이다. 처음에는 우리말 제목과 가사로 대중가요가 이루어졌었으나 점차 외래어뿐 아니라 외국어도 등장하게 된다. 제목에 처음으로 영어를 사용한 노래가 1949년 현인이 부른 ‘럭키 서울’이었다. 이 노래는 ‘서울’을 에스, 이, 오, 유, 엘이라는 영어 철자명으로 부르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슈샤인 보이’, ‘아리조나 카우보이’, ‘샌프란시스코’ 등 외국어로서의 영어가 제목으로 쓰인 노래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한편, 가사에 영어 단어가 아닌 문장이 쓰인 것은 1992년 3월에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가 처음처럼 여겨진다. 1집의 대표곡인 ‘난 알아요’에 please stop이라는 말이, ‘환상 속의 그대’에 let's go와 farewell to my love가 등장하는 식이다. 이를 따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로 5개월 뒤 같은 힙합 장르인 현진영 앨범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에서도 let's go가 등장하는 등 가요계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끼친 영향은 음악적으로나 가사 측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크기였던 것 같다(음반 사전심의제 폐지에 끼친 영향을 그 업적 가운데 아주 크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힙합 가수들, 특히 미국 교포 가수들이 힙합을 구사하면서 빠르면서도 부드럽게 이어져야 하는 가사 상당 부분을 그에 유리한 영어로 지으면서 이런 경향이 발라드, 록 등 다른 장르에까지 미쳤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영어 가사가 애교 수준을 넘어 단락을 이루는 등 외국어 사용이 가요계에 강화되자 한때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엄혹한 검열의 세계가 다시 오기를 반기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그런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는 어려웠던 듯하다. 한자나 한문이 하던 과시 기능을 영어가 대신하는 것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편, 창작자들과 연구자들의 인터뷰나 논문을 보면 영어 등 외국어 가사를 사용하는 이유와 의도, 동기는 매우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창작자들과 소비자들의 영어 친화성이 그 배경이라고 하는 분석이 있다. 영어를 생산하고 소비하지 못하면 영어 가사가 등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치품의 대당어가 '미제'였던 우리 사회의 영어 사랑에 비추어 응당 이해되는 내용이다.
대중음악인들의 생존 전략상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내 음악 시장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김연자, 계은숙 등 일부 트로트 가수들이 일본에 진출하였음이 떠오른다. 이는 전형적인 현지화 전략이다. 그러나 영어권에 선보일 노래가 아닌 국내용 노래의 가사까지 영어로 지어야 할 이유가 그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면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그냥 ‘겉멋’ 부리기에 다름 아니라는 시각이 있다. 일종의 사대주의랄까. 물론 창작자들이 이에 대해 수긍한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 진실은 아직 저 너머에 있다.
영어 가사 채택을 선호하는 현상에 대한 창작자나 분석가들의 주장 하나는 영어의 언어적 특성 또는 매력 때문이라는 점이다. 영어는 받침이 발달한 우리말과 달리 모음이나 유음, 마찰음들이 상대적으로 우리말보다 더 자주 이어져서 부드럽게 발음되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부분부분 가사로 활용하기 좋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영미권 팝송을 들으면서 자라고 배운 탓에 영어가 익숙한 세대가 점점 주류를 차지하는 현실도 영향을 미친다는 시각이 있다. 이와 더불어, 하고자 하는 말이 있는데 우리말로 적나라하게 하기에는 껄끄러운 내용을 영어로 담는다는 창작자도 있었다. 외국어로 메시지를 살짝 은폐하는 전략이다. 실제로 은유적이지만 매우 선정적인 내용이 영어로 들어 있어 심의를 피한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갈수록 가사가 중요시되지 않는 추세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다. 예전의 포크 음악 시대에는 가사를 먼저 마련하고 그에 맞는 멜로디를 지었는데, 지금은 멜로디를 먼저 만들고 가사를 붙이는 방식으로 창작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가요에서 메시지 전달은 부차적인 것이고 운율이나 리듬을 즐기는 시대이니 가사가 우리말이든 영어든 그저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극단적인 예가 우리말 가사였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 난해하여 구설에 올랐던 어떤 밴드들의 노래 몇 가지 아닐까 한다.
소비자 시각에서 가사의 언어 혼용을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 주 소비층인 젊은이들이 대중가요를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수단으로 보면서 기성 세대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저항하는 장치로 삼는 경향이 있다고도 한다.
지금은 아예 노래 가사 전체가 영어로 발표되는 일도 있으나 전혀 이상하지 않게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 우리 문화 상품의 세계 진출 즉, 한류 덕을 맛보았기 때문이겠다. 이런 가요를 우리 대중가요로 봐야 하는지는 논란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가요계 전체가 다 이런 형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 가사에 편중되었던 가수가 나이 들면서 우리말 가사를 더 많이 창작하거나, 힙합 가수들 가운데 영어 가사보다는 우리말 가사로 창작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 가사의 채택은 음악적 기준, 산업적 기준, 개인적 선호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이러한 기준은 언제나 변할 수 있고 소비자들이 정체성을 만드는 수단은 여러 가지이니 가요 가사의 언어가 앞으로 변할 가능성은 많다 하겠다.
다시 ‘골든’으로 돌아가자. ‘골든’의 가사는 총 315어절인데, 이 가운데 15어절이 우리말이다. 다른 5곡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문한 필자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골든’ 이전까지 빌보드 핫 100의 10위 안에 들었던 케이팝은 모두 5곡이었다. 그런데 이 곡들은 커버가 그다지 만들어지지 않았었다. 빌보드 상위권에 오르면서 커버가 많이 만들어진, 즉 외국인들이 들어 즐길 뿐 아니라 따라 부르는 데 열중한 케이팝 가운데 이렇게 많은 한국어 가사가 있었던 적이 ‘골든’ 이전에는 없었다. '골든'의 가사에 여기저기 들어 있는 한국어 가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어두워진 앞길 속에/끝없이/영원히 깨질 수 없는/밝게 빛나는 우리. 근래에 로제의 ‘아파트’가 이른바 콩글리시 ‘아파트’를 우리 식 발음 그대로 제목과 가사에 등장시켜 신선한 충격을 준 적이 있었는데, 이때 ‘아파트’는 단순한 게임 구호였고 단어 하나였다(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게임에서 쓰는 문구 ‘채영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랜덤 게임’이 우리말로 등장하기는 하나 이를 가사로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된다). 즉 서로 차원이 다르다. ‘골든’ 이외의 다른 노래들에도 커버가 이어지고 있고 여기에는 당연히 외국인들도 등장하는데, 우리말 가사를 약간 어설퍼도 훌륭한 한국어로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파트’만을 우리 발음으로 외치는 부르노 마스를 보는 것을 한참 넘어서는 경험이다.
문자적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한다. 미국의 음원 서비스 스포티파이와 타이달에서 이 노래들의 가사 가운데 우리말 부분이 한글로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서비스에 로마자가 아닌 문자가 끼워져 있는 경우를 역시 과문한 필자는 처음 본다. 드라마 때문에 한국어를 배운다는 외국인은 봤으나 이제 케이팝 가사를 읽으려고 한글을 배우고 한국어를 익히는 경우도 나타날 조짐 아닌가(아이돌 팬덤 세계에서 오빠 oppa, 언니 unni와 같은 한국어 단어가 영어화되어 옥스포드 사전에 실린 것과는 다르다).
이렇듯 이제 케이팝의 인기와 영향력이 우리말 가사를 부분적으로나마 채택해도, 또 가사 표기를 한글로 해도 세계인이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정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니 국내용 대중가요의 가사가 어떤 양상으로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우리 가요 가사에 영어가 쓰인다고 한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계 시장으로 나가는 우리 가요에 우리말 가사와 한글이 등장하니 어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이런 시대에 다다르고 보니 대중 예술인들의 선택이 그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고자 하는 음악에 열중하다 영어가 필요하니 영어 가사를 썼고, 그러다 보니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이런 날이 왔지 않은가(단지 겉멋으로 영어 가사를 끼워 넣은 경우는 물론 예외이다). 무릇 만주족처럼 자기 언어와 문화를 버릴 정도가 아니면 절제 있는 언어의 교류는 불가피함을 넘어서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현상을 보며 섣부르지만 우리는 문화의 힘, 공동체 의식, 인류애와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서로 나와 다르다고 따돌리며 배제하고 자기 부류들하고만 어울려 산다면 무슨 재미와 변화, 발전이 있을 것이며, 필요할 때 무슨 낯으로 도움을 청할 것인가. 상호 교류가 없는 언어문화는 얼마나 단조로울 것인가. 문화의 힘을 역설한 백범 선생 또한 인류애 차원에서 문화 발전을 바란 것이지, 우리만 잘살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백범일지>>의 다음 문구를 다시 새기며 선생의 혜안에 감탄을 그지 않는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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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말과글>> 2025년 가을호에 실린 것을 다듬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