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살 지역까지 정했으니 이제 집을 구하는 숙제만 남았다. 물론 그밖에 세세하게 신경 쓸 일들이 여전히 많긴 하지만 주거만 해결돼도 대략적인 큰 줄기는 완성되는 셈이다. 우선 주거 형태를 선택해야 하는데, 아파트 생활은 지겹도록 해봤으니 제주에서는 흙을 밟으며 살고 싶었고, 시골에 드문드문 위치한 단독주택은 왠지 무서우니 단지로 구성된 타운하우스가 적합할 거라는 결론이 섰다.
시골 주택은 워낙 각양각색인지라 단조로운 도시의 아파트에 비해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았다. 먼저 관련 카페와 블로그, 유튜브를 보며 어떤 집을 구해야 하는지 혹은 피해야 하는지 알아봤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집요한 검색을 통해 나름 대로의 체크 리스트를 작성했다.
남향
비단 주택뿐만 아니라 모든 공간을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난방비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빛이 잘 들지 않는 공간은 너무 우울하다. 아무리 밝은 전등도 볕을 대신할 수는 없으니, 무조건 해가 잘 드는 밝은 곳으로 고를 것.
난방
표선은 내가 사는 지역 대비 겨울에 10도 이상 기온은 높지만, 바람이 많이 불고 그늘진 곳은 체감온도가 상당히 낮아 난방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LPG 연료비가 어마어마하다는 얘기를 듣고 도시가스 난방 시설을 찾았지만 결과적으로 단 한곳도 없었다. 제주 시내의 아파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택은 LPG 혹은 기름을 연료로 사용한다고 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측벽 소음
아파트에 층간 소음이 있다면 주택에는 측벽 소음이 있다. 옆집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소음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니 참고할 것.
주변 축사
지역이 지역이니만큼 축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끔씩 바람 타고 멀리서 넘어오는 냄새는 어쩔 수 없지만, 축사는 최대한 멀리해야 (내 코가) 산다. 이 냄새라는 게 24시간 내내 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집이 있다면 시간대 별로 방문해 보는 걸 추천한다. 신기하게도 축사를 기준으로 비슷한 거리에 있는 동네라 할지라도 어느 곳은 냄새가 지독하고 어느 곳은 축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클린하우스 접근성
숨만 쉬고 살아도 왜 때문인지 쓰레기가 나오니 클린하우스의 위치 또한 매우 중요하다. 아파트 단지 안에 몇 개씩이나 되는 분류 배출 시설을 이용하다가,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충격적이었다. 마을 전체에 몇 가구 없는 시골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타운하우스 단지 내에도 클린하우스가 따로 마련되지 않아서 공용 시설을 이용해야 하다니. 그래도 제주 법이 그렇다면 따라야지 어쩌겠는가.
잔디 관리
주택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잔디. 하지만 비가 많이 오는 봄, 여름에는 돌아서면 쑥 자라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연세에 추가 비용을 받고 잔디 관리 업체에 맡기는 임대인도 있고, 본인이 직접 깎아주는 임대인도 있고, 전적으로 임차인에게 맡기는 임대인도 있으니(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집을 알아볼 때 잔디 관리 여부도 꼭 물어보자.
곰팡이, 수압 체크
이건 뭐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생각했는데, 극악무도한 습도로 유명한 제주에서는 곰팡이 없는 집을 찾는 게 더 어렵다고 한다.
실제 매물을 찾아 본격적으로 부동산을 뒤지기 시작한 건 입도를 몇 달 앞둔 22년 10월부터였다. 아이의 학사 일정에 맞춰 1월 중순에 입도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11월 초쯤 제주에 방문해서 집을 구하면 딱 적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제주 오일장, 네이버 카페 다섯 군데, 네이버 부동산, 블로그를 통해 대략적인 부동산 시세를 알아보고, 현지 공인 중개 사무실에 전화해서 미리 약속을 잡았다. 집을 구할 때까지 몇 번이고 제주에 올 수 있는 여건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약 없이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웬만하면 한 번 방문했을 때 목적을 달성해야 할 터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3박 4일.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내 집 찾기' 프로젝트는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됐고 정말 많은 집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우리가 1월 중순에 입주할 계획이라고 하면 집주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보통 집을 보고 계약을 하게 되면 늦어도 40일, 일반적으로 한 달 안에는 입주해야 한다고 했다. 지역적 특성상 제주의 많은 집들은 한 달 임대료가 제법 높은 편이기 때문에 그들은 집을 공실 상태로 두는 걸 원하지 않았고, 나 역시 비어있는 기간까지 월세를 미리 내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에 드는 집이 두 곳 정도 있었지만 위에 언급한 연유로 날짜 조율에 실패해 계약까지 이어지지 않았고, 이틀 뒤에 혹시라도 연세나 날짜를 조금 협의할 수 있을까 싶어서 전화를 했더니 그새 계약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역시 내 눈에 좋은 건 다른 사람 눈에도 좋은 법이고, 좋은 물건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만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첫 번째 집 구하기에 실패하고, 우리가 너무 빨리 왔다는 판단하에 12월 초에 다시 제주를 찾았다. 11월은 시간적 여유는 있었지만 시기가 너무 빨랐다면, 12월은 집을 구하기엔 적기였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번에도 집을 못 구하게 되면 제주살이는 그냥 포기해야 할 처지였다. 처음의 욕심을 내려놓고 점점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매물 자체가 거의 없을뿐더러 조금 괜찮다 싶은 집은 우리가 미처 보기도 전에 바로바로 계약이 되는 상황이다 보니 나는 철저하게 을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타운하우스, 단독주택, 빌라뿐만 아니라 연세, 전세, 매매, 분양까지 가리지 않고 정말 하릴없이 발품을 들였다.
카톡 '나와의 채팅'에 메모해둔 매물 정보
섬 전체가 관광지라 할 수 있는 제주의 특성상 집을 구하는 대부분의 수요층은 단기 임차를 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연세로 나온 집의 대다수는 풀옵션인 경우가 허다하다. 냉장고, 세탁기, 식탁, 침대, 소파, 에어컨 등은 기본이라 할 수 있고 조금 더 갖춰진 곳은 책상, 수납장, TV, 인터넷이 포함되어 있다. 임대료가 올라가면 드물긴 하지만 건조기, 에어 드레서, 커피 머신, 정수기가 있는 곳도 더러 있었다. 그런 집은 옵션뿐만 아니라 정말 당장이라도 들어가 살고 싶을 정도로 인테리어도 멋지고 조경 관리도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정한 예산, 위치, 향 등 절대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부분은 포기할 수 없었기에 결국 적당한 선에서 옵션이 다소 부족한 집을 선택했다. 집이 깨끗하고 해가 잘 드니 부족한 가구는 저렴한 걸로 사서 쓰다가 버리면 되고, 달리 생각하면 빈 공간이 많으니 손님을 초대하기도 좋을 것 같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집 구하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돈'이다. 비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선택지는 얼마든지 넓어진다. 난방비때문에 너무 큰 집은 부담이 된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 사라지는 연세가 아깝다며 매매를 고려할 필요도 없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집에 살다가 싫증 나면 다른 곳으로 옮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육지와 제주에서 두 집 살림을 해야 하는 우리 형편에는 당시의 선택이 최선이었고, 그 정도의 집을 구할 수 있게 된 것만도 매우 감사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또 누가 알겠는가. 머지않은 미래에 제주에 마음에 쏙 드는 내 집을 하나 장만하게 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