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율이 위험해질 때

프레임 전환 전략

by 또 래 호태

서킷 브레이커


서울, 오후.

그날은 원래 “좋은 날”로 기록될 뻔했다.

며칠 전까지 뉴스는 같은 숫자를 반복했다.


코스피 6000.


누군가는 “이제 1만도 가능하다”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그 말을 믿었다.


정부가 내놓은 메시지도 그 믿음을 보탰다. 부동산에 쏠리는 돈을 줄이고, 자본시장을 키워 “생산적인 투자”로 흐름을 바꾸겠다는 방향. 말은 깔끔했다. 부동산 투기를 잡고, 돈의 흐름을 바꾸겠다.


그래서 실제로 돈이 움직였다. 부동산에서 빠져나온 돈이 주식으로 향했다는 얘기가 동네 증권사 창구에서도 들렸다. 문제는, 시장은 약속을 믿는 순간부터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오후 1시 12분.


증권거래소 전광판의 숫자가 갑자기 멈췄다.


서킷 브레이커 발동.


거래가 잠깐 끊기자, 멈춘 것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심장 박동이었다.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증권사 알림, 뉴스 속보, 단톡방.


주식하는 사람들의 언어는 빨랐다.


“정부 신호 믿고 들어갔는데…”
“부동산 막는다더니 주식으로 돌리라더니…”
“이럴 거면 왜 신호를 줘.”


손실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말은 오래 못 갔다.
손실은 참을 수 있어도 ‘내가 속았다’는 감정은 참기 어렵다.


그런데, 정치가 더 무서워하는 장면은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


서울 외곽의 한 식당.


점심시간이 늦어져 손님이 듬성듬성한 시간, TV 뉴스에서 속보가 흘러나왔다.


“코스피 급락… 서킷 브레이커 발동…”


식당 주인이 국자를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주식하는 사람들 또 난리네.”


테이블 하나에서 누군가 웃었다.


“주식은 원래 그런 거 아니야? 오르다 내리다.”


다른 사람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이며 말했다.


“부동산 막는다고 해서 주식으로 돈 옮긴다더니, 결국 또 저렇게 됐네.”


그들은 화를 내지 않았다. 흥분하지도 않았다.
대신 아주 짧고 차가운 결론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기들끼리 돈놀이야.” “우리는 어차피 못 끼어.”


그 말이 끝나고 나서 식당 안에 남은 건, 분노가 아니라 냉소였다.


분노는 불길처럼 타오르다가 꺼진다.
냉소는 겨울처럼 오래 남는다.
정치가 가장 두려워하는 기온은 바로 그 차가움이다.




남중국해 상공.


대통령 전용기 안은 조용했다.
비행기 특유의 낮은 진동만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권좌는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보고서에는 같은 단어가 반복되어 있었다.


급락. 패닉. 불안.


옆에서 일정기획관이 먼저 말을 꺼냈다.


“투자자들은 지금 분노하고 있습니다.”


권좌가 고개를 들었다.


“그걸로 끝나나?”


일정기획관이 고개를 저었다.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말의 순서를 조심했다.
이 비행기 안에서 중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시점’이었다.


“더 위험한 반응은, 주식하지 않는 사람들 쪽에서 나옵니다.”


권좌가 물었다.


“왜?”


일정기획관이 대답했다.


“투자한 사람은 화를 냅니다. 손실은 곧 책임을 찾게 만들거든요.”


그녀는 잠깐 멈추고 말을 고쳤다.
설명으로 끝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주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럼?”


“평가합니다.”


권좌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일정기획관이 덧붙였다.


“주식하지 않는 다수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경제를 정확히 보나?’ ‘정부가 보낸 신호를 믿을 만하나?’

이 질문이 퍼지면… 지지율은 고점에서 꺾일 수 있습니다.”


권좌가 창밖을 바라봤다.
바다는 고요했고, 그 고요함이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고점에서 꺾이면… 돌아오기가 어렵지.”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정치의 지지율은 주식 그래프보다 더 무섭다.
한 번 꺾이면 사람들이 ‘다시 믿어야 할 이유’를 요구한다.




또 다른 속보


그때, 서울에서 속보가 하나 더 도착했다.


"방울회장 녹취 공개"


보고서 문장들은 짧았고, 뜨거웠다.
녹취의 내용은 ‘사실’이라기보다 ‘의혹’과 ‘해석’으로 포장되어 번졌다.
핵심은 하나였다.


'검찰이 진술을 압박했거나, 특정 방향으로 유도했다는 의심.'


권좌가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


“절묘하군.”


일정기획관은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절묘하다는 말은 “좋다”가 아니라 “쓸 수 있다”에 가까웠다.


이제 정치가 움직일 수 있는 레버가 생겼다.




서울, 국회.


여권은 빠르게 반응했다.


녹취가 확산되자, 의원들의 SNS에 같은 문장이 반복됐다.

표현은 달라도 방향은 같았다.


“조작수사 의혹이다.”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


당 지도부가 모였다. 기자들이 복도에 늘어섰다.
말은 짧아졌고, 표정은 단단해졌다.


“이건 그냥 사건이 아닙니다.” “사법 시스템 문제입니다.” “국민 앞에서 따져야 합니다.”


국정조사 카드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더 큰 말도 뒤따랐다.


“공소 유지가 정당한지 재검토해야 한다.”


법률적 결론을 내리기 전에, 정치는 프레임을 먼저 만든다.
지금 여권은 그 프레임을 만들고 있었다.
경제 뉴스가 차지하던 화면 위로, 사법 뉴스가 올라오려는 조짐이었다.




회심의 미소


서울의 밤. 어느 건물의 불이 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그날 뉴스는 빠르게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서킷 브레이커가 화면을 채우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자막이 올라오고 있었다.


“검찰 조작 의혹 공방 확산”


경제 뉴스는 아래로 밀려났다. 그 장면을 누군가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기자라고도 했고 브로커라고도 했고 어떤 사람은 설계자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세계에서는 다른 이름이 더 자주 쓰였다.


만배 고수.


그는 화면을 오래 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대장동 사업 설명을 하던 날이 떠올랐다.


도면 위에 그려진 선들. 지분 구조. 그리고 마지막 숫자. '수천억'


그때 그는 말했다. 돈은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이 움직인다.

그리고 사람이 움직이는 순간 돈의 길이 열린다.

그날 이후 그 돈을 두고 많은 사람이 움직였다.


성남시가 움직였다. 가압류. 환수 소송. 금고를 잠그려는 시도들.

검찰도 움직였다. 자금 흐름을 묶어 두기 위한 절차들이 이어졌다.

그 돈은 아직 완전히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정치에서는 그 돈을 이렇게 불렀다. "청구서"


청구서는 조용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청구서는 독촉장이 된다.

독촉장이 되는 순간 사람들이 먼저 움직인다.


그는 TV 화면을 다시 바라봤다.


방울회장 녹취. 검찰 논란. 국정조사 이야기.


판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와인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했다.


회심의 미소.




서울의 오래된 서재_공자광


공자광은 TV를 끄지 않았다.
켜 둔 화면에서 헤드라인이 바뀌는 속도를 보고 있었다.


그는 책 한 권을 꺼냈다. 표지는 낡았고, 제목은 단순했다.


'공작왕이 걸어온 길'


공자광이 책을 펼치자, 밑줄이 그어진 문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권좌는 언제나 지뢰밭 위에 서 있다."


그 아래에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지뢰를 통과하는 방법 세 가지.


우회. 개척(순차적 제거). 정면돌파(폭파)


그리고 마지막 줄.


고해성사.


공자광은 그 마지막 줄을 오래 보지 않았다. 그 방법은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카드다.

정면 돌파는 ‘승리’가 아니라 ‘청산’에 가깝다. 너무 세고, 너무 위험하고,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간다.


지금은 그 단계가 아니다.


공자광이 TV 화면을 다시 봤다.
서킷 브레이커. 그리고 방울회장 녹취. 여권의 국정조사 추진.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안개.”


지뢰가 사라진 게 아니다. 지뢰밭은 그대로다.
다만 지뢰밭 위에 안개가 깔리면, 사람들은 발밑 대신 앞을 본다.


그게 공작의 시간이다.




가장 큰 지뢰


공자광의 머릿속에서 가장 큰 지뢰는 늘 하나였다.


대장동.


그 사건은 단순한 정치 공방이 아니었다.
돈이 크고, 이해관계가 깊고, 시간이 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돈은 ‘끝나지 않은 돈’이다.


수천억.


그 돈은 이미 한 번 벌어졌고, 그래서 끝난 돈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가 ‘최종적으로 쓰게 될’ 돈이다.


그 돈을 두고 움직이는 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청구서는 독촉장이 된다.


공자광은 그 구조를 이렇게 부른다.


청구서. 독촉장.


청구서는 기다린다. 독촉장은 뛰어온다.

독촉장이 오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그때는 말이 바뀌고, 표정이 바뀌고, 충성도 바뀐다.


하지만 오늘은… 아직 독촉장이 아니다. "오늘은 안개다."




남중국해 상공.


권좌가 휴대폰을 들었다.
일정기획관이 옆에서 말했다.


“문장 하나면 됩니다.” “너무 길면 희석됩니다. 너무 약하면 묻힙니다.”


권자는 잠깐 망설였다.
지금 필요한 건 ‘설명’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그는 문장을 썼다.


"증거를 조작하는 일은 살인보다 나쁜 범죄다."


전송.




바뀐 헤드라인


서울.

헤드라인이 바뀌기 시작했다.

경제 뉴스가 아래로 밀렸다. 그 자리에 정치 뉴스가 올라왔다.


누군가는 환호했고, 누군가는 반발했고, 대부분은 지켜봤다.


주식하지 않는 다수는, 여전히 차갑게 웃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자광은 책 위에 날짜를 적었다.


서킷 브레이커. 방울회장 녹취.


그는 펜을 내려놓고 한동안 그 두 줄을 바라봤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이제 누가 움직이는지 보면 된다.”


그 말은 선언이 아니라 점검이었다.
공자광은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움직임을 기다린다.


움직이는 쪽이
지뢰를 밟을 준비가 된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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