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직지사에서

하늘은 작은 예수가 아니다

by 꺼벙이

오늘은 파아란 하늘이 그립다.

갈항사지, 이곳엔 갈항사란 절이 있었다. 누가 절을 세웠는지 알 수는 없지만 동과 서에 석탑을 세운 것은 알 수 있다. 석탑 한 부분에 언제, 누가 세웠는지 글을 새겼기 때문이다.
절터, 깨진 기와는 세월에 무너진 전각을 그리워한다. 휑한 절 마당을 천 년 넘게 말없이 내려다보는 돌부처가 깨진 기와를 위로한다. 돌부처도 천 년 풍상에 여러 곳이 아프지만 아직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돌부처는 오늘도 옛 일을 그리워한다. 듬직한 동탑과 서탑이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면서 그 옛날 탑을 돌던 등 굽은 할머니를 그리워한다.
동탑과 서탑은 예전처럼 제자리에 있다면 돌부처에게 그나마 위로가 되었을 텐데, 석탑은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다.
갈항사지 동서오층석탑은 국보이다. 일제강점기 때 왜인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가려다 들켜 서울 경복궁 마당에 놓였다.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선 뒤엔 박물관 마당에 나란히 서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석탑 몸돌 안에서 나온 사리함은 국립대구박물관 상설전시장에서 석탑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
환지본처, 금강경에 나오는 말이다. 석가모니는 배가 고프면 걸식하러 나갔다. 걸식이 끝나면 본디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금은 유물이 본디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객지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갈항사지 동서삼층석탑이 곧 제자리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직지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년 만에 찾은 직지사 풍경은 상전벽해다. 황악산에서 흘러내린 계곡이 내를 이룬 곳에는 ‘직지문화공원’, 조금 더 들어가면 직지사 맞은편엔 ‘사명대사공원’으로 꾸며졌다. 잡목이 어수선한 야산을 보는 것보다 이렇게 잘 꾸며진 공원을 보는 게 좋다. 시민이나 관광객도 쉴 공간이 있다는 건 다행이다.

하늘은 내 바람과 다르게 더 짙은 회색으로 변하고 휑하니 부는 바람은 곧 비가 올 것이란 예고 같다. 운수납자가 같은 내 발걸음은 더 빨라진다. 오랜만에 만난 직지이거늘 이렇게 떠나야 하딘 아쉽다.

김천시립박물관, 전시한 유물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다. 그나마 전시한 유물도 거의 재현품이다. 박물관 유리벽 안에 길항사지 동서삼층석탑이 있다. 이도 재현품이다. 재현품이 아닌 진품이 이곳에 왔으면 좋겠다고 문화해설 하시는 분과 이야기를 나눌 때 하늘은 울기 시작했다.

사명대사공원과 직지문화공원 사이에 김천도자기박물관과 백수문학관이 있다. 나는 도자기엔 그렇게 관심이 없지만 문학관은 지나치지 않는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는 없다.

백수문학관은 시조시인 정완연(1919년~2016년) 선생을 기리는 곳이다. 정완영 선생은 김천 봉산면 출신으로 호인 백수(白水)는 김천(金泉)의 천(泉)자를 파자하였다. 이는 시인께서 고향을 그리며 사랑하였음 보여 주는 것이다. 문학관에 계신 박 선생이 나를 안내하며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밖은 세찬 비가 내리고, 문학관엔 박 선생과 나뿐이기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

1972년 인문계 국어교과서에 이 분의 시조가 실렸다고 하는데 나는 오늘 처음으로 백수 선생을 만났다. 1972년엔 나는 중학생이기도 하였지만, 내가 고교에 가서도 글로 뵌 적이 없었다.

안내한 박 선생도 오늘 처음 만났다. 작은 문학관, 한 바퀴 도는데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 선생은 사무실로 나를 이끌고 가서 차를 내주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박 선생은 나와 같은 비슷한 현대사를 겪으며 지금까지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중등학교 영어 선생으로 있다가 퇴직하셨고, 지금은 백수문학관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신다고 한다. 고향은 김천이지만 자란 곳은 전주이며 대학생활과 40대까진 서울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영문과를 졸업, 출판관련 일을 하셨고, 40대 후반에 고향 김천으로 내려와 기간제 교사로 10년쯤 계셨다고 한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나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비도 멎었다.

어두운 직지문화공원의 흐릿한 조명을 따라 공영주차장으로 가는데 낯익은 얼굴이 앞서 간다. 박 선생이다. 두 번째 만남이다. 그는 내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한다. 비빔밥에 그는 소주를 한 병이나 마셨다. 시내버스로 통근을 한다고 한다. 음주하지 않은 나는 그를 집 가까이에 내려 드렸다. 차 문을 닫지 않고 하늘을 올려본 뒤 박 선생은 내게 카페에 가자고 한다. 나도 참으로 뻔뻔하다. 그를 따라 걸었다. 연화지 주변은 늦가을이라 쓸쓸했지만 카페 조명은 밝았다. 차를 마시고 1980년대 이야기로 우린 신이 났다. 카페 영업이 끝날 시간에 일어났다.

악수하고 돌아서가는 나를 박 선생이 불러 세웠다.

“최 선생님, 한번 안아보면 안 될까요?”

살면서 이런 일이 없었기에 당혹스러웠지만 나는 기껏은 마음으로 그와 포옹을 하였다.

김천을 지나 시인 정지용의 고향 옥천을 이틀 여행한 뒤에 기차로 서울에 입성하였다. ‘한글맞춤법교습소‘란 밴드 회원 다섯 명과 잡담으로 회포를 풀다가 내가 김천서 겪은 일을 말했다. 회원들도 우아해하였다.

“박 선생이란 분은 왜 최 선생님과 포옹하자고 했을까요?”

어느 회원의 말에 나도 궁금한 일이었다고 말하고 곧장 전화를 하였다. 왜 포옹을 하였냐고 물었다. 해맑게 웃는 박 선생의 얼굴이 보인다.

“저는 그날 작은 예수를 만났습니다. 작은 예수님을 대접하였고, 헤어짐이 아쉬워 포옹을 한 것입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길 기대합니다.”

박 선생의 답에 밴드 회원들도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회원들과 헤어지고 서울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옥천으로 돌아갔다. 기차와 레일이 만나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내게 ’작은 예수‘를 연이어 부르는 노래와 같았다.

작은 예수.

나는 언제나 작은 예수들과 살았고, 살고 있지만 그들이 작은 예수인지도 모르고 살았고, 살고 있다. 함께 사는 이들도 예수며 스치며 지나친 이들도 예수다. 내가 작은 예수로 대접 받았다면 나도 모든 이를 작은 예수로 여기고 대접한다면 다툴 일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직도 아귀다툼하는 세상 속에 머물고 있다. 언제쯤 나는 내 가족과 이웃을 작은 예수로 여길 수 있을까?

하늘에 신이 있는 게 아니다.

하늘에 예수가 계신 것이 아니다.

신은, 예수는 늘 내 곁에 계신다.

내일은 파아란 하늘,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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