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현실에 대해
일본에 오래 살았던 사람으로서 최근 비자 관련 이슈를 보면,
어떤 사람에게 국가는 ‘선택지’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처럼 느껴진다.
비자 신청 비용 인상, 정책 변화 가능성 같은 이야기들이 나오자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의견이 꽤나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 불만이 쌓여 피로를 느낀 것일까,
그 불만의 의견들을 그저 지켜보지 못하는 쪽의 시선도 분명 존재했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건,
같은 이야기를 두고도 사람들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이 튀어나온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에는 그저 또 하나의 인터넷 논쟁처럼 보였지만,
곱씹어보니 이 싸움은 정책의 옳고 그름 이전에
‘이 나라를 어떤 위치에서 바라보느냐’의 차이에서 나온 감정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국가는 아직 ‘선택 가능한 공간’이고,
누군가에게 국가는 이미 ‘삶의 터전’이다.
같은 정책을 보고도 감정이 전혀 다르게 튀어나오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외국인 입장에서는 비용 인상이나 정책 변화가
“그럼 나 여기서 나가라는 건가?”라는 신호로 읽히기도 하고,
“나는 나갈 수도 있는데, 이렇게까지 할 거야?”라는 마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애초에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으니
(이 마음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기저에는 분명히 있다)
불안은 곧 ‘이동’이라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반면 그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이미 그 사회 안에 삶의 대부분을 걸고 살아온 내국인에게
그런 불만은 단순한 정책 비판이 아니라
내 삶의 터전 자체가 가볍게 취급되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살아야 하는데, 불만 얘기할 거면 떠나
이런 감정이 겹친다.
그래서 외국인의 불만은
“이 나라가 나를 밀어내는 건가?”라는 두려움이 되고,
그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의 반감은
“내가 살아온 이 현실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방어가 된다.
논쟁의 표면은 단순한 정책 변화이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선택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단순한 한마디로 싸움이 번지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 한마디'가 나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보며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국인도 어쩌면 귀를 막는 것이 아닌 그 불편한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 가서 사는 것을 선택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내 인생’의 선택권을 잃는 걸까.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과연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돌아오는 걸까.
우리는 더 큰 사랑, 더 큰 안정, 더 큰돈과 커리어를 위해
조금씩 선택지를 줄여가며 산다.
처음에는 분명 ‘내가 고른 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선택이
되돌릴 수 없는 조건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온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 선택을 계속해서 정당화하며 살게 된다.
왜 이 길이 맞는지, 왜 이 선택이 최선이었는지,
자기 자신에게 수없이 설명하면서.
아마 귀화도, 결혼도, 사업도, 커리어도 비슷한 구조일 것이다.
자발적으로 내렸던 결정이 시간이 지나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울타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사람은
자신의 선택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말에 더 예민해진다.
나 역시 지금은 여전히
국가도, 일도, 삶의 방식도 ‘선택할 수 있다’는 감각 속에 살고 있지만,
결혼과 일과 같은 책임으로 더 깊이 묶이게 된다면
언젠가는 나 또한
“떠날 수 있는 사람의 언어”가 불편하게 들리는 쪽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과연 지금의 나를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지금 내가 쉽게 말하는 ‘선택’이라는 단어를
그때의 나는 얼마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요즘 이 이슈를 보며 드는 생각은 단순하다.
국가를 둘러싼 갈등은 종종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지금 서 있는 삶의 위치 차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이미 내려버린 선택을 지키기 위해
생각보다 더 많은 말로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