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간의 조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by 윤소원


1957년 인간이 만든 지구 태생의 물체가 우주로 발사되었다. 인류의 염원과 질투를 담아 떠올랐다.

이 물체는 우주에서 몇 주 동안 태양이나 달, 별 같은 천체들이 회전하는 동안 동일한 중력의 법칙에 따랐다.

그들은 지구를 공전했지만, 인간이 만들었기에 스푸트니크는 별도 아니고 달도 아니었다.

인류가 오랫동안 동경해 온 밤하늘엔 미지의 물체가 맴돌았다.


단지 과학적 진보에 불과했을 이 사건을 한나 아렌트는 매우 중대한 인류의 사건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인간이 지구라는 감옥에서 탈출할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안도감이라고 소회를 말했다.

철학을 탐구했던 한 명의 지식인으로서, 그녀는 과학 기술의 개발에 복합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인류는 지구에 영원히 속박된 채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할 만큼,

한나 아렌트는 역설적으로 지구를 우리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 간주했고, 또 그리 말했다.

그녀는 1957년에 있었던 과학적 진보를 인간의 새로운 도전으로 바라봤지만, 또 부정적인 셈이었다.

이 모든 것은 언젠가 벌어질 대탈출의 서막과도 같았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공기와 사랑 같은 것으로 바라보지 않았기에 당연했다.

그녀가 인간의 조건으로 우선시하는 것은 활동과 관조였으며, 그녀는 그 장소인 지구를 사랑했다.

지구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활동과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이었으며, 자아를 확인하는 장소였다.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세계들은 안정된 배경인 지구에 건설되어 우리의 불멸성을 가능케 했다.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장소, 숨을 쉬는 환경들이 기본성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였다.

그녀는 활동과 사유의 모든 장소인 지구를 사랑했기에, 과학적 진보에 복합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렇기에 그녀는 글의 서론부터 지구와 과학적 진보에 대해 언급했고, 생각들을 설파했다.

<인간의 조건>은 그녀가 유대인으로서 태어나 사유의 끝에서 얻은 것들에 대해 담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과 단어는 우리가 알던 것들과는 온전히 다르게 쓰였다.


한나 아렌트는 활동, 관조, 노동 같은 개념들을 다양하게 사용했고, 말했다.

그녀의 스승이자 학문적 동반자인 하이데거가 그랬듯이, 그녀는 단어의 사용에도 신중했으니 말이다.

한나 아렌트가 사용했던 단어와 개념은 새롭게 창조되어 그녀만의 뜻을 담았고,

그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했던 개념들을 우리에게 말하기 위해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앞서 말했듯, 그녀는 인간의 삶을 관조와 활동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크게 나눴고.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이라면 응당 추구해야 할 것들을 영속성과 불멸성으로 결정지었다.

인간이라면 영원히 기억되는 멋진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녀는 말속에 이런 뜻을 담았다.

그리고 영속과 불멸이라는 개념을 꺼내면서, 그녀는 이를 설명할 말로 사적영역과 공적 영역을 담았고.

그녀는 이 모든 개념을 담을 하나의 그릇으로, 고대 그리스의 정치적 장소인 폴리스를 꺼냈다.


100년 전에 살았던 한나 아렌트는 인류는 망해간다고 판단했기에, 고대 그리스를 말하며 글을 썼다.

그녀는 현재의 인류가 가질 수 없는 장소이자, 가장 순수한 곳으로 폴리스를 지명했고.

공적영역의 대표주자로 간주하는 폴리스에서는 정치적 현안과 자유의 추구가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인간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명의 무상함을 극복하고 영원불멸해진다고 말한다.

다원성을 드러냄으로써, 폴리스(공적 영역)에서의 행위는 정치적 가치를 순수히 얻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찬양했던 폴리스는 중세와 근대를 지나면서 자연스레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정치적 인간과 인간의 조건은 상실되어 갔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이끈 유럽의 산업혁명,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 같은 노동 예찬자들의 탓일지 모른다.

가장 낮은 곳에 있던 노동과 자본의 천박함은 역전되어 인간의 순수성을 짓밟고 가장 높은 곳에 올랐으니.


이 모든 말들은 나에게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낯섦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노동과 자본의 위대함은 현재의 인간에게 지극히 대단함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대다수의 자기 계발서나 싸구려 릴스에서 나오는 노동 예찬론에 그녀는 정 반대에 서 있으며,

나는 그녀의 말을 오롯이 여기에 옮겼을 뿐이다. 그녀는 위대해져 가는 노동을 비판했다.


조금 자세히 말하자면, 그녀는 노동과 자본에 엮여있던 역사 속 수많은 사건들을 언급했다.

역사적 흐름과 다양한 학자들이 노동을 신성시하는 문제를 만들었고, 그럼으로써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다.

그로 인해서 순수해야 할 정치적 사유와 인류의 타락이 발생한 셈이다.


이토록 노동을 비판한 한나 아렌트이지만, 그녀의 말은 단순한 비판과는 다르게 위치해 있다.

오히려 그녀는 노동과 자본 그리고 사회가 악하다는 말까지는 들어가지 않는다.

역사와 시간 속에서 그것들의 위치전환이 문제임을 지적할 뿐이다.

단순한 생명유지 활동이 되어야 할 노동에서 인류가 인간 본질 실현을 찾는 것이 문제라는 말.


여러 학자와 오늘날의 유명인들이 노동을 부의 원천이자, 인간 본질의 실현이라고 평가했을 때,

그녀는 행위와 노동 그리고 사유를 철저히 분리했을 뿐이다. 노동은 노동일뿐이다.

오늘날 많은 직장인들이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면서 그 안에서 인간 본질을 찾진 않는다.

대다수는 그 시간을 괴로워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사유와 인간 존재를 탐구하는 행위라는 개념과는 다르게, 노동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학자들과 역사적 시간에 의해서 최고가 되어버린 노동의 변신을 그녀는 정치적 사망으로 간주했다.


이렇게, 노동이 사회의 가장 최고적 가치가 되어버렸을 때, 자본은 필연적으로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

그녀가 철저히 구분 짓고자 했던 사적 영역에 해당한 자본이, 정치적 영역인 공적영역을 지배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노동과 자본의 영향력이 순수해야 할 사유의 시간을 망가트렸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인간은 영원성과 불멸성을 추구하던 인류 본질의 폴리스를 잃어버렸으며

우리는 인간의 조건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설파한 셈이다.


인간이 어떻게 목적을 갈구하며 영원 - 불멸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 책은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말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이하게 들릴 뿐이다.

그녀는 인간은 지구에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불멸을 추구해야 한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우습게도 노동과 자본이 모든 것을 잠식한 오늘날엔 그렇게 살 수가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현대 사회는 그녀가 가장 싫어하고 경고했던 것들의 진화체로 가득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나 아렌트가 추구하고자 한 인간의 조건을 따라갔을 시에, 오히려 고통받을 뿐이다.

그녀가 경고했던 노동은 한층 진일보하여 인간의 권력이자 새로운 바이블이 되었다.

노동의 가치인 자본은 행위와 사유를 우스꽝스러운 곳에 처박았고, 새로운 철학이 되었다.


정치적 사유와 행위, 그리고 삶의 목적을 찾아 헤맴으로써 유한한 삶이 가치를 얻는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의 세상은 그녀가 경고한 것들로 가득 하기에,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인간의 조건을 추구하면 우리는 현대 사회의 인간이 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셈이다.


이 책의 모든 말들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깊게 생각하며 행위하고, 노동에서 의미를 찾지 말고, 기억되는 삶을 살아라라는 뻔한 말.

Avicii의 The Nights라는 노래의 가삿말과 닮아있으며, 많은 현인들이 주장한 말이다.

노동을 비판하고, 인류에게 경고를 남겼던 현인의 말은 오늘날 유행가와 놀랍도록 닮았다.

하지만 이 간단한 글귀는 현대사회에서 극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1년 평균 독서량이 1권을 넘지 않는 독서 기피의 시대인 것이 가장 우선시 되는 원인이다.

책을 읽지 않고, 사유가 우스꽝스러운 곳에 위치한 국가에서는 돈이 사람의 권위가 되는 탓이다.

이러한 시대에는 그 누구도 본인만의 가치를 찾는 삶을 우선하라고 가르치질 않는다.

가장 앞장서야 할 부모조차도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교육적인 괴롭힘을 선물하는 것이 예시다.

아이들의 꿈과 재능은 농담이 되었고, 의대준비를 위해 영어 조기교육을 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전 세계가 그렇지만, 한국은 이러한 점에서는 과열된 양상을 보였다.

이미 국민들 대다수는 돈과 직업 그리고 성적으로 어릴 때부터 인간의 서열을 나눴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을 때, 노동의 결과물로 가장 좋은 가치를 얻었다.

블라인드 같은 커뮤니티는 모두의 고충을 덜고 소통하고자 하는 장소로서 본질을 잃었다.

그곳에서는 직업의 이름으로 권위가 정해진 채 모두가 기이한 소통을 일삼는다.


결론적으로, 그녀가 추구한 삶의 가치는 이미 한국에서는 우스꽝스러운 농담이 되었다. 오물에 박혔다.

오히려 그녀가 경고한 것들은 새장의 가장 높은 곳에 걸려서 해와 달의 옆에 위치해 있다.

역사와 철학책에서 말해온 노예의 일이었던 노동은 신성시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모두들 노동과 자본을 위해서 삶을 투구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다가 사망에 이른다.


독서와 사유 같은 것들은 중2병, 無가치 같은 말들 안에 감금되어 순수성을 잃었다.

정치적 행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치는 새로운 개념을 얻었고, 그것은 스포츠가 되었다.

현재 전 세계는 정치로 서로를 구분 지으며, 그 탓에 정치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지배한다.

그 덕에 나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정치적 행위는 멸종되고 있다.


이젠 그 누구도 순수하게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며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은 그녀가 경고했던 내용에서 한층 진일보하였고, 사람들은 새로운 나쁨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가 말했던 진정한 인간의 조건과 삶은 더욱 찬란한 가치를 맞이했다.

예술에 삶을 헌신했던 노구, 모두가 존경할만한 업적을 남긴 위인, 거장이 된 소설가들이 예시다.

그들의 삶은 단순한 죽음을 넘어서 다양한 이들이 한날한시에 존경과 추모를 내비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누구도 그들처럼 살 용기를 못 냈고, 그러지 못했기에 그들의 삶은 역설적으로 영원 불멸한 순수를 얻었다.

그녀가 말했던 이론이 쓰레기가 되어가고 있지만, 그럼으로써 모든 것이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조건>의 첫 시작으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떠났다.

그녀가 추구하고 경고하고자 한 것들은 일말의 균형조차 없이 더 극단적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그녀가 주창한 것들은 다양한 곳에서 가치를 얻고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