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An Die Musik>
어떤 노래는,
한 사람의 생을 지나
다른 삶까지 데려온다.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마을에서
나는 슈베르트의 노래 속에서
두 영혼을 함께 만났다.
2021년 11월 29일,
파리에 도착한 다음 날,
나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향하는
TER 열차에 올랐다.
열차가 파리를 벗어나자,
창밖의 회색 들판이
천천히 열렸다.
나는 이유 없이,
슈베르트의 노래를 떠올렸다.
아직 제목은 분명하지 않았다.
빈센트 반 고흐가 생을 마감한 마을.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곳으로
가고 있었다.
배낭 속에는 백신 접종 확인서,
휴대용 검사 키트, 옥시미터가 들어 있었다.
코로나 시대,
번잡한 도심보다는 한적한 근교가 끌렸다.
무엇보다
빈센트의 붓끝이 머물던
들판과 하늘,
그 숨결을 느껴보고 싶었다.
기차는 약 50분 만에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역에 도착했다.
마을버스는
그림 속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곳,
장례식 장면이 그려진
표지판 앞에서 멈췄다.
장례 날짜와 테오의 무덤,
들판과 하늘에 대한 설명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반 고흐 <들판 속의 장례식> 안내 표지판, 오베르 쉬르 우아즈
오베르는 파리 북서쪽,
인구 7천 명의 작은 마을이었다.
세잔, 코로, 피사로도
이곳에서 머물렀다.
내 마음은
마지막 72일을 보낸
빈센트에게 닿았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프랑스를 무대로 활동한
네덜란드 출신 탈 인상주의 화가였다.
오베르는
동생 테오가 퇴원 예정인 형을 위해
거처를 찾던 중,
피사로의 추천으로 고른 마을이었다.
파리와도 가까웠고
자연이 아름다웠으며,
그가 존경한
화가 프랑수아 도비니의 화실이 있었다.
표지판을 따라
도비니 거리를 걸었다.
아틀리에를 지나
그의 동상이 서 있는 오르막을 오르자
길 끝에서
오베르 교회가 보였다.
그 교회는
그림 속 그 자리,
공동묘지로 이어지는
길목에 서 있었다.
짙은 하늘과
낮게 눌린 지붕은
그의 고향을 향한 마음을
담은 듯했다.
삶의 고통과 환희는
말년에 터져 나왔다.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질 속에
그의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1890년 5월 20일,
생레미 요양원을 떠난 빈센트는
며칠간 파리에 머문 뒤
오베르에 도착해 가셰를 만났다.
1888년 2월,
아를로 내려갔던 그가
2년 3개월 만에
북쪽의 마을로 돌아온 셈이었다.
아를에서 정신병 증세가 나타난 것은
그해 12월이었다.
고갱과의 갈등,
테오의 약혼으로 인한
후원 중단 가능성.
그 모든 불안이
그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떠올렸다.
후원 하나에
겨우 기대어 서 있던 빈센트.
긴 그림자의 등줄기가
바닥에 붙어 있었다.
그날,
고갱을 위협한 뒤 집으로 돌아와
그는 칼로 왼쪽 귓불을 잘라
거리의 여인에게 건넸다.
그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겨울 공기처럼
서늘해진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그를 병원으로 옮겼고
진단은
‘측두엽 간질’이었다.
병명은 붙었지만,
그의 고독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아를의 기억을 지우고자
그는 북쪽의
조용한 마을로 왔다.
마지막 계절,
고요와 격정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교회 뒤편
좁은 길을 따라
공동묘지로 향했다.
발밑의 마사토가
유난히 사각거렸다.
나는 그 소리를 줄이려
걸음을 늦추었다.
서쪽 담장 아래,
덩굴식물이 드리운
두 개의 작은 비석.
하나는 빈센트,
다른 하나는
테오의 것이었다.
가난과 우울,
간질에 시달리던 빈센트.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뒤,
테오 역시
마비성 치매로
세상을 떠났다.
형제이자
영혼의 동반자였던
둘.
그들의 묘 앞에서
나는 오래
서 있지 못했다.
그 묘 앞에 서자,
이유 없이
슈베르트를 떠올렸다.
그날 오베르에서 떠오른 슈베르트의 선율은
몇 해 뒤 캐나다의 길 위에서
다시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2024년 6월 말,
3주째 길 위에 있던 때였다.
밴쿠버에서 켈로나, 에드먼턴을 거쳐
1년 6개월 만에 토론토로 돌아오는 길.
써드버리의 지인 빈센트 댁에 들러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넉넉한 뜰에서 기른 채소와 과일이 빛나던 저녁 식탁.
그 초대에 감사하며
나는 빈센트라는 이름이 잇는 고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노래를
다시 불렀다.
어쩌면 나 또한,
무언가에 기대어
겨우 서 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은 음으로,
한 사람은 색으로
세상과의 간격을
버텼다.
바람이 불어
덩굴 잎이 흔들렸다.
나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선율을 떠올렸다.
그가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시에
곡을 붙인
<음악에 An Die Musik>.
고통을 견디게 해 준
음악에 바치는 고백이었다.
G장조의
담백한 반주와 정제된 선율은
그가 세상과
거리를 두는 방식처럼
들렸다.
나 또한 힘든 시절
빈센트의 붓놀림과
슈베르트의 선율 속에서
위로를 받았다.
병마와 싸우며
빛을 남긴 빈센트,
어둠 속에서
안식을 건넨 슈베르트.
나는 두 생에
경의를 표하며,
나지막이 불렀다.
공동묘지를 나와,
추수 끝난
들판 길을 따라
남쪽으로 걸었다.
5분쯤 지나자,
[까마귀 나는 밀밭]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 길 위에서 나는
그의 그림 속을
걷고 있었다.
그는 테오에게 이렇게 썼다.
“편평한 풍경을 마주하면
내겐 영원만이 보인다.”
1890년 7월 27일,
그는 이 들판에서
스스로에게 총을 쐈다.
이틀 뒤 새벽,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고,
까마귀 몇 마리가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날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었다.
누군가는 음악을
‘소리로 만든 그림’이라 했고,
조각을
‘멈춰 있는 음악’이라 말했다.
반 고흐 공원의
오시프 자드킨 조각상은
말없이
그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귓가에 다시 울린
슈베르트의 <음악에>.
그 노래는
고통 속에서 붙잡은
희망이자,
삶에 대한 찬미였다.
빈센트와 슈베르트,
두 영혼은
내 마음속에서
조용히 맞닿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Du holde Kunst, ich danke dir dafür!"
“사랑스러운 예술이여, 그대에게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