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갖지 못했던 아이
이제,나의집
첫번째 이야기_ 집을 갖지 못했던 아이
어릴 적 나는 집이 없었다.
집이란 보이는 형태를 말하기도 하지만 가족, 따뜻함, 평안함이 생각난다.
폭력적인 아빠와 책임감 없는 회피 강한 엄마 사이에 삼 남매 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난 감성적이며 예민하고 불안감이 높은 아이. 아니,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아빠와 엄마 함께 살았던 기억은
6세 때쯤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공허했다.
늘 술에 취해 있는 아빠와 늘 근심 가득한 엄마, 그 사이 칭찬받고 싶은 나.
엄마의 결심
엄마는 우리 세 남매를 데리고 외할머니 댁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였다. 나는 집이 없이 전전하며 살게 되었다.
외할머니, 외삼촌의 따가운 눈빛.
“우리 누나가 왜 너희 아빠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살아?”
그러게나 말이다. 엄마의 선택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나.
어릴 적 나는 내가 잘못한 것만 같아 숨죽여 살았다.
여자인 우리에게는 반찬도 김치만 주시던 외할머니.
과자는 꽁꽁 숨겨뒀다 남동생에게만..
이게 뭐라고 마음속 깊이 남아 있다. 나의 존재 자체가 원망스러웠다.
엄마의 분노
어느 날 친할머니와 엄마가 전화로 싸우는 소리가.. 갑자기 우리를 친할머니 댁으로 보낸다 한다.
난 초등학교 3학년. 여동생 2학년. 남동생 5세.
화가 난 엄마에게
“안 가면 안 돼?”
“응. 너네 할머니 한번 당해보라 그래.”
마음이 무척 상했다.
우리의 존재는 아주 쓸모없구나...라고 느꼈다.
자존심이 상해 딱 한마디만 더 했다.
“진짜, 가?”
“응. 가.”
그렇게 모르는 택시를 타고 친할머니 댁으로... 50분 거리를 세 남매와 짐만 보내졌다.
친할머니도 한 성격 하시는 분이라 우리를 그대로 엄마에게 돌려보냈다.
그렇게 밤이 되도록 왕복 3번을 한 뒤
“할머니, 엄마가 지금까지 우리 키웠으니 이제 아빠 쪽에서 키우세요.”라고 내가 말했다고 한다.
결국, 여동생과 나는 친할머니 댁 남동생은 외할머니 댁에서 살게 되어 울며 생이별을 하였다.
친할머니 댁은 시골.
화장실과 씻을 곳은 마당에 있고 화장실도 옛날 화장실..
불편한 건 둘째치고 벌레와 밤 화장실은 무척 무서웠다.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덕분에 시골 친구들과 좋은 추억도 만들고, 지금의 남편도 만났다.
힘든 상황 속에 따뜻한 할아버지가 있어 기댈 수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시고
할머니의 분노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매 순간 부모의 욕.. 우리의 욕..
그녀도 좋지 않은 몸에 손주들까지 돌보느라 힘이 부쳤을 것이다.
사춘기가 겹쳐 매일매일이 힘겨운 날들, 분노의 날들.. 걱정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있던 중
친척의 사랑, 안쓰러운 마음
“엄마, 얘네들 방학 때마다 우리가 돌볼게.”
작은 아빠가 결혼하시고 작은엄마와 우리가 안쓰럽기도 하고 할머니의 쉼을 위해 방학마다 서울로 데리고 가 주셨고 최대한 많은 경험을 주며 마음을 주셨다. 나는 방학이 끝나고 내려가는 기차에서부터 며칠 동안 울기만 했다. 울고 울어 할머니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 흠.
정상적인 어른의 울타리는 나에게 큰 안정감을 주어 헤어짐이 무척 힘들었다.
작은 아빠, 작은엄마는 엇나가는 나를 양육하여 주셨다.
“우리가 첫째 데리고 갈게요.” 그렇게 고등학생 때 서울 친척집으로 가게 된다.
할머니에게서 벗어난다니 그저 기뻤다.
안락한 집과 경험들 그리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어른이 있는 집. 좋았다.
재미있고 좋은 추억도 가득하다. 지금까지도 나의 든든한 울타리 작은 아빠'엄마
하지만 친척집에서 거주한다는 건 아무리 서로 노력한다 해도 불편함도 있고 허전함도 있다.
나는 늘 누군가의 집에 있었지만 정작 머물 곳은 없었다.
아, 9살 차이 나는 사촌 남동생. 그리고, 함께 살고 있을 때 18살 차이 나는 사촌 여동생이 태어났다.
사촌 여동생의 탄생은
내가 언젠가 ‘나의 집’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조용히 가르쳐 준 첫 번째 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