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자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것인지

by 김윤


잠결에 생각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구성마저도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사회는 거인의 뇌일지도 모른다. 개개인은 거대한 생리적 흐름에 맞춰 움직이는 뉴런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착각을 발휘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신기하기 그지없다. 여기, 놀랍도록 우리의 삶을 한 줄기의 강에 착석시키고

삶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있다. ‘문화’ 라고 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와 닿는

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단어이다. 직장문화를 생각해보자면 기존 평생직장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시절과 달리 현재 직장은 그저 그 업계의 윤곽 정도로, 둥그스름한 의미로 쓰인다.

봉건적 질서에 기반을 둔 통제와 관리는 몇몇 기업을 제외하고 그 힘을 잃었으며 이는 각종

노동운동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의 추이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물론 구태여 인위적인

조작을 행사하는 것이 유연한 사회조직형태와 구두문화에 비해 시대 흐름 탑승에 독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 같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특정 문화권의 쿠세처럼 눈치채지 못할

작은 문제부터 국가적 변혁을 꾀할만한 굵직한 패러다임까지, 문화 탄생의 원인은 인간이고

문화가 스러지는 이유도 인간이다.

가장 흥미롭게 접했던 대중문화 연구의 한 예시를 보겠다. 대중문화의 수많은 연구 중 대부분은 이분법의 극단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의 복잡한 구조와 이유를 파헤치는 데엔 많은 에너지가 들어갔고 ‘지적 단순성’ 의 유혹에 이끌리는 것이

본능이었기 때문이다. 호기심과 모험심은 사치였으며 체제의 입장에선 여간 까다로운 변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모순과 한계에서 출발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념과 사회의 다른 결, 모순을 밝히고자 일렁이는 체제의 순응 속 힘의

의지를 잃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야 부정편향의 또 다른 시사점이 되었을지라도, 세밀하게

체제를 비판할 지적능력을 붙잡고 당시의 파시즘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고

현재 정세와 사회정서의 흐름을 바라보면 다시 곱씹을만한 가치가 있다.


아노미 속 기둥 세우기


현재 대한민국의 국론은 혼란을 겪고 있다. 서로 헐뜯으며 이해의 바늘구멍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오락실 게임을 보는 듯하다. 맞는 것이 맞는 것인지, 무엇이 사실인지, 그 정도는

어떠한지 판단과 이해의 시간보다, 바뀌고 부정당하는 기간이 훨씬 짧아졌다. 바야흐로

‘사유의 소멸’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국가에 큰 사건이 있었다. 자유를

제한하고 정부의 권력을 행사하는 가장 높은 수위의 방법인 계엄령을 내렸지만, 삽시간에

종식되고 그 대가로 정권이 바뀌었다. 하지만 바뀐 정권 또한 문제가 많고 내부적으로

일으킨 분란과 권한의 남용은 제대로 심판되지 않을 위기에 있다. 한쪽의 배에 올라타

관망할 노릇은 아니다. 특히 대한민국 특유의 경직된 내부구조와 협소한 담론 범주는

일관적이고 큰 그릇의 사고를 자꾸만 은폐한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원색적 비난과 사실

검증도 되지 않은 심증과 억측이 언론에 난무한다. 필자는 지금의 정세를 보며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다. 그 피로는 눈을 안쪽으로 굽게 했고,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과거에서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이 인식검열을 박차고, 파시즘에 묻혀 있던

대중문화와 사회, 개인을 탐구한 그들의 문화 속을 들여다볼 기회일지 모른다. 아도르노와

벤야민, 쇤베르크가 표현하고 싶었던 문화와 국가, 기술의 상호작용에 대한 생각들은 최초의

도전이고 자신의 분야의 밑단까지 바라보고 싶은 욕망이다. 예술과 문화는 사회의 거울이자

끊임없이 실천하고 변하는 장으로써 그것들이 이 상황에서의 역할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남산을 둔 서울의 스카인라인, 서울의 풍경을 볼 때면 지난 50년의 발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도르노는 과장을 조금 보태어 ‘불편과 민낯의 지속’ 을 사회를 온전히 볼 수 있는

가장 높이 있는 가치라 여겼고, 예술은 이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경제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화려한 껍질을 누리지 않으며 있는 힘껏 삶의

부조리를 목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계몽의 변증법> 서문에서 “승리한 사랑이 기꺼이

비판적 요소를 포기하고 단순한 수단이 되어 기존 질서에 봉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자기

의지와는 반대로 예전에 선택했던 긍정적인 무엇을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질시키게

된다” 고도 썼다. 사랑까지도 체제의 노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도르노는

논박을 통해 좀 더 나은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인간의 인위적인 합의와 격식의

의미에 대해 수많은 도구를 연구해왔다. 그 중 하나인 변증법은, 골동품일지라도 현시점에서

나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 다시 꺼내 볼 필요가 있다.


유용한 도구


변증법은 실로 간단하면서 효과적인 도구이다.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한 이 논법은 헤겔로

넘어오며 세분되고 복잡해졌는데, 일종의 찬반 토론으로 생각하면 된다. 명제를 두고, 정과

반을 정하고 서로의 영향을 주고받음을 인정하고, 결국, 진리에 가까워진다는 믿음에 맡겨야

한다. 조금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보겠다. “자유와 삶의 주인이 되려면?” 명제를 필두로

개개인을 지배하는 패러다임과 문화를 주인으로, 객체인 사회구성원을 노예로 가정해보자.

노예는 주인에게 복종하고 주인은 자유를 누린다. 하나 생활을 이어 나가면서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 노예가 주인을 위해 된장찌개를 끓인다고 해보자. 주인은 선택권이 있다. 먹지 않을

수도 있고, 좀 더 짜게 해오라 할 수도 있고, 메뉴를 바꿀 수도 있다. 노예는? 그저 주인의

주문대로 해줄 수밖에 없다. 근데 주인의 저 자유는 정말로 자유일까? 노예는 주인의 입맛에

맞게 요리를 할 수 있다. 반면 주인은 노예와 비교하면 직접 밥벌이를 해본 적이 없으므로

딱히 요리를 할 줄도 모른다. 먹어야 한다면 노예가 해준 대로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언가

보인다. 주인으로서 인정받으려면 노예의 인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노예의 가사제공에

의존한다. 결국, 주인의 자유는 노예에 의존하는 자유이다. 명령하고 따르고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은 주인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노예는 어떠한가? 된장찌개에 고기를

넣을 수도 있고, 간 조절에 다른 조미료를 쓸 수도 있다. 된장찌개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된장찌개 앞에서는 노예가 주인이 된다. 어쩌면 삶의 주인은 노예가 먼저 도달했을

수도 있다. 노예의 생각에 변화가 인다. ‘주인은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역전되고, 이제 맨 처음 던졌던 화두에 좀 더 섬세한 결론을 이어가게 된다.

‘진정 삶의 주인이 되려면 주어진 것만 받아먹지 않고 힘껏 ‘존재’를 발휘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 따라서 ‘국가의 존속엔 국민이 주권이고 국민 없이 국가는 의미가 없다는

것’ 이것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고 방금 꽤 괜찮은 합을 도출했다.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정반대로 보이는 의제들이 비로소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때를

가지는 소모성 기술임을 깨닫는다. 구조주의와 더불어 여태껏 등장하고, 등장할 이론 또한

똑같다. 영향을 행사하고 심판대에 안착한다. 적어도 변증법은, ‘무엇이든지 고정불변한

것은 없고 입장 또한 역전될 수 있다.’라는 가르침을 주고 부단히 탐구하기를 장려한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유행은 변한다. 필자의 나이라면 강남스타일이 등장한 때부터

한류의 큰바람이 불었다고 느낄 것 같다. 싸이월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으로 이어진

SNS 열풍으로 점점 더 빠르게 유행이 전환하고 읊기도 힘든 수많은 콘텐츠와 생각이

지나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 줌의 세월조차 되지 않는 근 30년간 일어난 일이다.

그것에 휩쓸릴 겨를이 있을까? 변증법은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와 삶이 대중문화와 생산적 국가체제의 반대를 산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대표적인 실패자의 유형과 성공한 자의 유형을 설정하고 둘의 입장을

고심해보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안 좋은 것은 안 좋은 것


얼마 전 미디어를 통해 각종 분야의 당락과 철없이 헤엄치는 질 낮은 콘텐츠와 도파민에

노출되는 필자 본인이 가장 고통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모든 의견을 전부 들어보거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시간도 없고 말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왜 단점을 드러내면

질타를 받는가. 모두가 저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갈 텐데” 헤겔이 생애 동안 중점으로

직시한 것은 물성적 세계, 즉 시대에 국한된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었고, 아도르노 또한 이에

작은 보탬을 표했다. 관점은 조금 다르지만, 아도르노는 시대에서 자기 자신을 뒤틀어버리는

모순을 보았는데, 약간의 낙관마저 부정했다. 시대적 한계 앞에서, 인간은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한계하에서 부여받는 자신의 존재를 내버려둔다는 것이었다. 현시대에

회의를 느끼는 이유도 이런 잘못된 것들에 영향받아오며 인간성을 잊고 자신들이 일군

시대와 문명을 변증법적으로 부정하며,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가 인간 내면을 어쩔

수 없이 변증법적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도르노는 기존 변증법이 지닌 전체주의의 가능성을 비판하면서 미래 지향과

모순과의 대립으로 발전시켜 ‘부정변증법’ 개념을 제시했다. 필자는 어렸을 때

주변으로부터 수신 받은 본인에 대해 성기 크기가 어떻고 키가 어떠하다 같은 외모 평가와

잣대, 학교폭력을 겪었던 과거에 대한 눈살만 찌푸리는 피드백과 무시의 논조가 깔린 동정에

상처를 갖고 있었다. 왜 그렇게 휘둘렸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절반 정도는 맞는다는

생각을 하고 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의 전사들은 따끔한

교훈을 준다. 모두 그 한 때의 문화적 상황과 기술적 감수성이 맞물려 아무 생각 없이 뱉어

볼 생각이 드는 찰나의 시간만을 차지하는 문구일 뿐이라고, 강단 있는 비판과 끊임없는

부정으로 성찰을 통해 더 나은 주체가 되라고 북돋는다. 필자 또한 요즘 사회는 부정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없이 살다가도 잠시 멈춰서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쓸데없이 이미지를 위한 자기기만을 일삼는 게 아닌지 반성할

기회를 준다.


진짜 보아야 할 것


가끔 바다 한가운데에 꼿꼿이 서 있으면 기시감을 느낀다. 뭔가 쓸려 나갈 것 같으면서도

몽환적인 감정을 말이다. 그럴 때면 무엇이 현실이고 꿈인지 분간이 잘 안 된다. 어차피

감각과 판단 모두 자신과 세상의 부단한 상호작용이고, 다른 동물들과 인간이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그럼 무엇이 진실한 현실이란 말인가? 아도르노는 이성이 오히려 세상을

개념으로만 짜여 있는 곳으로 받아들이게하며 자신을 비대하게 여기게 만든다고 한다.

따라서 순응자는 다양한 가치관과 신념을 삼는 것보단 그 안에 들어 살며 위안을

느끼고, 이에 반하는 존재의 등장에는 열렬히 투쟁한다고 덧붙였다.

대 인터넷 시대를 사는지금, 특정 주제나 언급하기 곤란한 문제에 대한 여론을 보면 대부분 이분법적 구도를 띠고 있고, 논리적이거나 납득될만한 설득이 아닌 충동과 허구가 난무한다. 변증법이 발전하며 가장 먼저 타파하는 관성이 이 사고였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감각을 전면 불신하고 세상 또한 인간의 발상인 이 과학체계로 유지되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았다. 자신 주위의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었기에, 그는 현재를 계속해서 느끼고 갱신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그런 인간 중심적으로 자연을 해석하는 이기적인

관찰과 기록의 세태의 경각심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볼 것을 피력하는 대표적인 문장인

것이다. 그의 객관적 시각과 절대성을 찾기 위한 갈구는, 훗날 유클리드 공간, 위상을 나타낼

수 있는 변하지 않고 위치를 표시하는 ‘데카르트 좌표계’를 탄생시켰다.


저출산과 고령화를 겪으며 내리막을 걷는 국민 정체성과 인식, 각종 정치적 이벤트와 사적

이기심으로 점철되어 대중영합주의가 폭주하는 현재, 벤야민이 주창한 기술발전에 인한

정치의 예술화, 예술의 정치화의 가속을 몸소 경험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를 잘 반영하는

숙명론적이고 비관적인 인생관을 가지는 대중과의 하모니는, 마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출범

시기인 광적 파시즘 배경을 복사해 가져다 놓은 것만 같다. 아도르노와 헤겔, 소크라테스의

변증법부터 시작하여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까지, 유물론을 연상케 하는 개념들의 곡선은

저 심연에서 허무주의를 드리우게 한다. 허나 잠시 세상의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이 의미

없고 한순간임을 자각하면 놀라운 세계가 펼쳐진다. 예를 들어, 갓 25살인

사회초년생이라면 약 3,900주의 일생이 남아있다. 70세까지 산다면 2,440주 밖에 없다.

우주는 너무나 크고 삶은 1번의 게임일 가능성이 높으며, 인간은 정말 ‘잠시’ 이 아름다운

별에 머물다 가는 존재이다. 이런 방대한 사실이 펼쳐지면 존재론적 공포에 잠식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칸트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 자신의 왜소함, 무기력함, 유한함을 깨닫는

동시에 사고하는 존재로서 자연으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고 말한다. 생명과

죽음 같은 초현실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무와 유를 마주하는 동시에 논리적 사고의 힘으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필자 본인도 포함하여 모두 초감각적 실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오히려 무지하기에 존재들은 서로 의지한다. 낙관적 허무주의 철학을 약 1년 전에 접한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채널에서 발굴해준 지혜였다. “인생이 유일한 경험이라면 그

외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이 문구는 아직도 포스트잇에 담긴 채 필자의 모니터에

붙어있다. 아무것도 의미 없다. 유한하다. 그렇기에 삶의 순간순간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가장 가까이 둘 때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된다. 개인적인 질책은

잠시 접어두고,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존재임을 실감하며 힘껏 세상을 만끽해야 한다.


마치며


이 글 또한 이러한 사유와 자기반성에서 시작했다. 공부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게으른

타성, 얄팍하고 진실하지 못한 형태의 유혹들, 상처받으면서도 갈구하는 관심, 이 모든 것을

인지하고도 안주하는 필자 자신을 말이다. 이번 수업으로 대중문화의 여러 이론을 접했고

이런 염세적이고 주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상에 필자의 상황이 이입되며 가장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필자는 견문도 그리 넓지 않고 식견도 충분히 쌓이지 않아

피부로 살아가는 이 대중문화와 국가, 또는 그에 준하는 구조적 모순의 갈등을 해소할만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실망스럽다. 논리적 허점도 많이 보인다. 하지만

난잡한 글솜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간결한 완결을 지을 수 있어 뿌듯하다. 다시 글을

써보게 해준 몇 안 되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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