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이는 이야기 문법

진주목걸이의 해체

by 김윤


얼리어답터 친구 덕에 메타사의 ‘오큘러스퀘스트2’ 를 거의 출시되자마자 사용해 봤을 때가 떠오른다. 지배된 것은 시각과 청각, 그리고 미미한 촉각뿐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 또한 가상 세계의 시민권자였다.


VR 기술은 이제 10년을 훌쩍 넘긴 기술이다. 등장 초기에는 “게임의 혁신” 이라 불리며 기대를 모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체감할 만한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기술적 안정성과 사용자 경험이 진화하고 미디어에 대한 인식이 성숙해지며 다시금 VR 게임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아직도 게임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캐릭터의 감정에 이입하고, 캐릭터의 성공을 응원한다. 때론 영화 속 주인공처럼 하늘을 날거나 낭만적인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다. 마음속에 품은 아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마음의 눈을 안쪽으로 굽게 한다. VR은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보는 존재’ 가 아니라, ‘이야기 속에 들어간 존재가 됨으로써 말이다. 본고는 VR 게임이 단순히 현실을 시뮬레이션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야기를 구성하고 몰입시키는 방식 자체를 전복시키는 미디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VR 게임이 기존의 고전적 내러티브 구조를, 어떻게 해체하고, 감각적-공간적 체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몰입을 형성하는지를 고찰한다. 또한, 미디어, 수용자, 컨텐츠의 구조의 변화를 봄으로써, 수용자 주체성과 서사의 본질에 대해 던지는 철학적 함의를 발굴하고자 한다.


게임은 본래 상호작용을 핵심으로 하지만, 게임의 내러티브 설계는 오랫동안 선형적 서사 구조를 따라왔다. 그 대표적 모델이 바로 ‘진주목걸이 구조’ 이다. 문학이나 영화, 전통적인 비디오 게임의 서사는 대체로 제작자의 의도 안에서 소비자의 감정이 따라가는 구조를 가진다. 선형적 내러티브 (Linear narrative)라 부르기도 하는데, 독자 혹은 플레이어는 이미 짜인 세계와 결말을 향해 달리는 수동적 탑승자에 가깝다. 진주목걸이 구조 또한 컷씬(서사, 목표 전달) – 플레이(행동) – 컷씬 – 플레이의 반복을 통해 전체 게임을 디자인해 나간다. 각 구간은 마치 목걸이의 진주처럼 독립적인 의미를 갖되, 하나의 실(디자인된 플롯) 위에 꿰어져 있다. 컷씬으로 강력하게 서사의 경험을 통제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라도 궤도로 돌려놓을 수 있으며, 어느 지점에서 감정선이 요동치는지 객관적으로 예측이 가능하다. 예컨대, <THE LAST OF US PART 1>은 선형적 감정 유도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아름다운 시퀀스와 비극적인 서사를 의연하게 고백한 유려한 레벨 디자인으로 영화 수준의 서사와 감정을 연출해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은 서사의 몰입을 구획한 울타리 안에 가둘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다음 장면의 트리거를 작동시키지 않으면 그 공간에 매몰된다. 소개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의도된 파이프라인을 따라가며, 심리적 원리를 이용한 간접통제로 구현해낸다. 예컨대, 결정적인 레버를 내리거나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다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몰입감을 심히 훼손한다. 이와 대비로 VR이 소망하는 내러티브는 전통적 컷씬을 폐기한 체, 연속적인 공간의 전개, 사물, 사건의 타자화로 독립된 ‘나 자신’ 을 가지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과 사건은 발생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VR내러티브는 ‘나를 따라오는 세계’ 라는 인식에서 탈피하여 이야기 전달방식의 재구성, 재편성 매체로써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자연화 되다시피 하던 경직된 서사구조에 변혁을 주었다.

출처 : 픽사베이

가장 큰 특징 첫 번째는, 예측 불가능성과 공간적 자유로 인한 몰입의 심화다. 영화나 소설의 기존 매체는 흘러가는 맥락 안에서 어느정도 결과나 상황의 결과를 단기적으로, 장기적으로 직감할 수 있다. 원근감이 극대화된 360도 공간탐색에서 사용자는 거리와 방향, 심지어 내면적 관심에 따라 정보를 수집하고 의미를 재구성한다. 공간 속에서 흥미롭거나 유용할 법한 사물을 발견하고, 그것이 세계와 어떤 반응을 주고받는지 체험하는 과정은 인간의 원초적 생존 본능과도 닿아 있다. 오브젝트에 대해 세계가 특정 행동 이외에 일체 반응하지 않는다면, 디지털 공간의 경계와 한계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금방 흥미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VR게임은 현실감을 느끼고 이입하게 하는 다채로운 사물과 세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창의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갈 의지를 가지게 한다.


두 번째로 부단한 감각 간의 소통 요구로 인한 다중감각의 공존, 현전감 증진이다. 기존 무형적 개념인 감정, 심리 등은 정성적 판단모델이었지만, 시대 발전에 따른 실험 수준의 제고로 환경지각 관련 통제, 물리적 상호작용 등 감각적·물리적 요소들이 현전감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인으로 제시되었다. VR의 시청각 관련 부대장비로 촉각과 유체흐름의 구현이 사실적으로 느껴질수록 ‘여기 있다.’ 는 감각을 진지하게 여기게 된다. 스튜어(Steuer, 1992)에 따르면 현전감은 가상환경의 생동감과 상호작용에 좌우된다. 감각의 전이로는 현전감, 몰입감의 증진을 실현할 수 없다. 이동의 개념은 더 이상 강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VR내러티브의 상호작용 동작은 하드웨어를 수단으로 하나의 공간, 하나의 ‘나’ 에게 오감의 동시다발적 피드백을 주입하여 연속적인 인지를 시키고, 신경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게 끊임없이 붙잡는다. 이로써, 현실의 객관적인 신체(objective body)와 가상으로 시뮬레이션 된 신체(virtual body)와의 일체를 경험하게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인간은 현실을 완전히 ‘정신적 모델’ 로 바라본다. 초현실주의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는 곰방대를 그려놓고 밑에는 “This is not pipe” 라고 적어 놓았다. 마그리트는 자신의 그림을 보고 곰방대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도대체 곰방대가 맞는데 왜 곰방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곰방대가 아니라 ‘곰방대를 묘사한 그림’ 이다. 저 작품으론 담배를 피울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언뜻, 언어유희 같지만, 기의와 기표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실제로 철문이든 나무문이든 알 수 없는 무엇이더라도 매우 일상적인 소통에서 ‘사람이 드나들기 위해 옆으로 밀어서 열고 닫을 수 있게 만든 물건. 또는, 그런 물건을 달 수 있도록 터놓은 공간.’ 의 함의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보이는 모든 것을 모조리 아는 것으로 바꾼다. 평소의 언어관습과 행동양식을 대상이 되는 물체나 개념에 정확히 대응시켜 사용하지 않고, 항상 어느정도 까지가 생활상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정도인지 의미를 계산하고 허용하며 살아갈 뿐이다.

이렇듯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인지의 추상화 기질을 이용해, VR콘텐츠 이외의 게임 개발 또한, 모든 것을 표현하지 않고, ‘그저 그것을 한다’ 는 느낌을 주는데 주력한다. 예를 들어, FPS 장르의 게임을 만든다고 해보자. 시스템상 총알을 전부 모델링과 렌더링을 한다면, 용량과 요구 권장사양은 걷잡을 수 없게 커진다. 특히, 360도의 전방위적인 그래픽을 모두 소화해야 하는 VR의 기술적 특성을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총을 쏠 때의 격발음과 화염, 움직임만 구현하고, 너머에 쓰러지는 상대를 연출한다면, 우리는 일련의 살아온 경험에서 상대가 총알을 맞았다고 ‘착각’ 할 수 있다. 굳이 모든 것을 구현하지 않고도 같은 효과는 챙기면서 크기는 줄일 수 있는 것이다.


단편적으로 대상의 형을 기억하는 뇌의 단순성, 시각 정보처리의 낮은 보안이 아이러니하게도 VR콘텐츠의 새 지평을 열어주었다. VR의 서사는 한 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에 흩뿌려진 진주들이며, 그걸 어떤 순서로, 어떤 방식으로 엮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자유로움이 더욱 VR게임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것이다. 어딜 가든지 장소에 존재하는 병렬적인 타임라인을, 그저 자유의지에 따라 감각으로 엮으면 된다.


미디어-수용자-컨텐츠의 긴밀한 상호작용


VR을 통한 게임 경험은 기존 매스미디어와 2차원 평면스크린에서 접하는 방식과는 조성되는 경험의 종류가 다르다. 같은 공간을 거쳐도 각자의 시선, 순서, 선택에 따라 다른 이야기들이 생성된다. VR 게임은 서사의 단서와 감각적 조각들을 제공할 뿐, 그 조합과 의미를 찾는 것은 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위임된다. <HALF – LIFE : ALYX>는 과감히 실을 끊어버리고, 특정 대사나 강제적인 흐름 없이, 공간 안의 사물을 어떤 시점에서 바라볼 것인지, 무슨 도구로 작동시키는지 등, 주체적인 선택이 서사의 일부, 크게는 전역적인 분기점으로 작동하게 하는 독특한 미쟝센을 선보였다. 결과적으로, 체험하는 사용자의 수만큼의 해석, 서사가 존재하게 된다. 이는 전통적 미학관점에 기인한 콘텐츠 향유방식에 미디어 - 수용자 - 컨텐츠의 측면에서 유의미한 질문을 던져주었다.

ss_4912f4c3d259a472e9898f0a7b1f819a533d2c1e.1920x1080.jpg 출처 : STEAM 상점 메인페이지

미디어는 컨텐츠를 운반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4차 산업혁명시대, 내러티브의 변혁으로 시청각적 출력 장치에 머물렀던 미디어는 매트릭스로 변모한다. 기존 뉴스, SNS, 포털사이트 등의 수취자와 발신자의 구분이 명확한 전통적인 연극상의 구도에서, 물리적, 디지털적 구현을 막론하고 정보전달과 감정 소통의 기능을 탑재한 유, 무형적 창구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거시적으로 하드웨어, 인터페이스, 컨텍스트가 그 용도를 드러내는 발현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지금은 HMD가 중심에 서 있지만, 햅틱 부트수트, 트랜스머신, 동작캡쳐, 스피커 등, 각 감각에 집중한 하드웨어가 상향된 수준의 경험에 부응하도록 발전하고 있다. VR콘텐츠는 미디어가 실생활에서 향유하는 컨텐츠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인식에서 0과1의 디지털 자원으로 조합한 인터랙티브 소통매체 수준에서 나아가, 유리된 현실에서도 온전히 실재감을 보존할 수 있도록 콘텐츠 유니버스의 범용적인 진입로로써 고민을 이어나갈것을 주창한다.


VR게임에서 가장 급진적인 전환점은 서사의 주체를 사용자에게 이양한다는 점이다. 사용자는 능동적인 공저자가 된다. 무대의 관객이 아니라 공연의 일부가 되기도 하며 시점을 유동적으로 넘나든다. 접속할 때마다 다른 공연, 배우,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원한다면 인터랙션 없이 관찰만으로 이야기를 완결 지을 수 있다. 개입의 정도에 따라 서사의 톤과 밀도가 미묘하게 바뀌는 것이다. 이야기 구성편견을 탈중심화 하고 문화적, 시대적, 가치관적 방면에 절대적으로 기인하여 초개인적 사고를 바탕으로 양보 없이 자신의 서사를 자유로히 구성할 수 있다. 게임 산업에서 가장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이 이 컨텐츠의 향유방식이 집단적 쾌락경험 증진에서 개개인의 가치관과 니즈의 존속과 존중으로의 전환이다. 수용자는 점점 더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살아지는 것’ 으로 느낀다. 이를 잘 포착하는 것이 열쇠일 것이다.


마치며


전통적으로 관객은 초입의 흥분유도, 절정으로 가는 과정에 은밀한 기대심리를 가지고 있다. 클라이맥스를 위해 일부러 호응과 유머를 줄임으로써 누리는 대비효과는 연극, 서커스 등의 막장식의 공연에서 두드러진다. ‘흥미곡선’ 개념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게임도 이와 비슷하다. 초반 게임을 이어갈 동력을 부여하기 위해 ’후크’ 를 거는 것이 첫 단추이며 이후의 진행에서 클라이막스를 보고 싶다는 묘한 호기심과 의지를 심어주고 만족을 시켜주는 것이 이상적인 게임디자인이다. 하지만 이에 기반한 콘텐츠 개발에 있어 관련 서적은 찾기 드물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기존 방식의 게임을 경험하든, VR을 통한 차세대 콘텐츠를 감상하든, 인간이 주체라는 것이다. 내재된 사고방식과 놀이의 근간원리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재미를 느끼는 중추도 해마와 전두엽의 편도인 것은 변함없다. 보는 것으로 발현하는 문화적, 수동적 자세는 지금도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고, 이에 대한 평가 방향도 시각적 우아함에 기초하여 살을 붙여 나간다. 매체가 빠르게 변화해도 각자의 흥미곡선의 굴곡이 급변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조급해 않고 기존의 흥미와 감동을 보존할 창의적인 이식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현재 단계에서 내볼 수 있는 보다 생산적인 진단이다.


게임의 미학과 학문으로써의 연구는 컴퓨터의 태동과 역사, 상반되는 게임의 존재론적 두 이론의 거대한 담론 속에서 발전해왔다. 일링크스 요인인 짜릿함, 공포, 경직 등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선 기술의 발전을 곧게 따라갈 수밖에 없다. 레이싱 게임을 즐길 때 벽에 부딪혀도 현실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곧 죽을 것처럼 스릴을 즐긴다. 인간은 현실을 놀이와 결부시키고 싶은 잠재적 욕구가 있다. 게임의 목적에 따라 페달과 브레이크, 핸들 등으로 모양화한 것은, 그러한 니즈를 충족시키는 인지 디바이스이며 VR은 선두주자로서 가장 대표적인 현신이다.


접하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문다는 표현은, 하나의 흐르는 하천처럼, 자연스럽게 정신적, 개념적인 인지회로를 교모하게 속여 몰입이 끊기지 않게 정보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으로, ‘긍정적인 모호함’ 이다. 물같이 자연스러운 전개의 흐름은 언뜻,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분명 게임은 VR의 특이점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매개체이다. VR 게임 콘텐츠는 발화와 경청의 방식에 새로운 의문을 던졌으며, 이와 관련된 학제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변화와 VR기술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며, 또한 기존의 서사구조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 추이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