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공포로 생각하는 내 인생의 적정선

by 마리아 장

며칠 전, 옆집 여자가 세상을 떠났다. 겨우 오십 대 중반이었다. 뇌종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지 몇 달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다.


이웃들 사이에서 흔히 있을 법한 사소한 일들로 우리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슬펐다. 아니, 어쩌면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슬픔 위에 미안함까지 겹쳐져 더 마음이 아픈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중년이다. 그래서 죽음이 ‘옆집’에 찾아왔다는 사실은 단순한 애도가 아니라 공포로 다가왔다. 죽음이 추상적인 개념으로 저 어딘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공간에 찾아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인생이 생각보다 훨씬 짧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확정적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면서도 잊고 사는 사실들. 이에 대한 인식은 나를 두 극단의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들었다.


중년이 된 지금, 나는 과연 무엇을 해왔을까. 남길 만한 무언가를 했을까. 내가 살다 갔다는 흔적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대로 지나가기에는 아쉽지 않은가. 더 열심히 살아서 무언가 괄목할 만한 것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곧 반대편 생각으로 기울었다. 어차피 짧은 인생이라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이라면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 후회가 없지 않을까. 놀고, 쓰고, 먹고, 가고 싶은 곳에 가는 삶. 무언가를 남기겠다고 애쓰다 스트레스로 병이 나 수명이 줄어든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또 다른 걱정이 뒤따랐다. 짧을 줄 알고 마구 즐긴 인생이, 생각보다 길어져 노년을 힘겹게 보내게 되면 어쩌나. 어느 쪽을 선택해도 명쾌한 답은 없었다. 딜레마였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나만의 적정선을 찾자.


적당히 즐기되, 나중에 돌아봤을 때 너무 큰 아쉬움은 남지 않을 정도의 소비와 선택. 흔적이나 업적에 대해서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하나의 흔적임을 인정하는 태도. 그리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


물론 목표를 세우는 것은 좋다. 언젠가 책 한 권을 내보는 목표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설령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동안 미소 지었던 기억이 남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백 년 후,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집에 사는 사람은 당신이 이곳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까? 작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의 우승자를 기억하는가?” 두 질문 모두에 대한 답은 ‘아니오‘이다.

이런 사실들을 떠올리면 더욱 분명해진다. 순간을 나답게, 충실하게 사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답게 사는 인생. 그렇게 완성되는 인생.


요즘 이런 생각들 때문에, 얼마 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추가하며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언제나 부족한 인간이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내 옆에서 더 투덕투덕 싸우며 오래 지낼 줄 알았습니다. 미안했습니다. 부디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