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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Sep 27. 2024

우리 지금 싸운 거야?

방법을 찾는 거지


밥 먹고 들어가려다가 펜느를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주에 반에서 4일간 여행을 간다고 한다. '오- 나이쓰 하네' 하며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 반 스텝 학생이 오더니 펜느, 무나, 캐롤리나에게 다음 주 여행을 위해 뭘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인사하고 방으로 가려는데 펜느가 '같이 갈래?'하고 나에게 손짓을 했다. '너네 반 여행 준비하는데 내가 거길 왜 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누가 불러주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며 따라가는 게 이곳에서의 나의 위치. 하하.


해야 할 일은 학생 키친에 가서 3일 치의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거였다. 준비라고 해봐야 별게 없고, 벽에 붙은 레시피를 보고 오트밀 가루에 요거트 가루, 설탕, 소금을 섞어서 비닐봉지에 담아놓는 것이다. 인원수가 7명이니 3일 치의 아침을 준비하려면 21인분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 그냥 단순히 덧셈과 곱셈을 좀 하고, 계량을 해서 이런 저런 가루들을 잘 담으면 될 일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전체 필요한 오트밀의 양을 가지고 펜느와 캐롤리나가 뭐라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숫자와 비닐봉지 어쩌고 하는 걸 봐서 계산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말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해서 나는 넋을 놓기 시작했다. 펜느가 어떤 이야기를 속사포로 던지면 캐롤리나가 바로 '노-' 하며 받아쳤다. 연이어 캐롤리나가 다다다 말을 하면 펜느가 숨도 안 쉬고 '노-' 하며 따발총 쏘듯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무나가 특유의 저음 목소리로 '잠깐, 나 통역(translation)이 필요해'라고 하며 중단시켰다. 무나가 캐롤리나에게 노르웨이어로 뭐라 물으니 캐롤리나가 영어보다 더 빠른 노르웨이어로 설명했다. 무나가 'Ok'하더니 이해했다고 했다. 멍하게 이 상황을 보고 있는 나는 영어도 못 알아듣고, 노르웨이어도 못 알아들으며, 심지어 같은 반도 아닌지라, 꿔다 놓은 보릿자루보다 못했다.


무나가 상황을 이해했다고 해결된 게 아니었다. 펜느와 캐롤리나가 이번에는 한 봉지에 몇 명분을 넣느냐를 가지고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비닐봉지 하나에 두 명분을 넣느냐, 세 명분을 넣느냐, 아니면 각자 한 봉지씩 만들어서 스물 한 봉지를 만드느냐를 가지고 또다시 엄청난 속도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걸 알아들은 나 자신 칭찬해) 만약 한국이었다면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 거참' 하고 진작에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사 입장일 때와 학생 입장일 때의 차이인 건가, 끼어들었다가는 '넌 뭔데 참견이야!'같은 소리를 들을 것이 상상이 되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캐롤리나는 원래 말할 때 무표정이긴 한데, 점점 더 표정이 굳어가는 게 보였다. 반대로 펜느는 말하면서 점점 얼굴이 붉어졌다. 급기야는 '노-!' 하고는 흥분한 목소리로 '내가 말한 건 이런 거야!' 하더니 비닐팩을 들고 와 점선을 따라 북북 뜯으며 'Like this! Like this!' 했다. 눈치를 보다가 옆에 서 있던 무나와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말이 없었지만 서로 나눈 것이 긴장감인 것은 확실하다.


애들이 정량보다 덜 먹으니 적게 넣어야 한다고 한 사람이 말하면, 모자란 것보다 낫다는 말이 바로 나왔다. 둘이서 한참을 그러더니 또 어찌어찌 'Ok, right' 하고는 결정이 나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첨가해야 하는 소금, 설탕 같은 가루들을 또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 레시피에는 '바닐라 설탕'이 적혀 있었는데, 키친에는 바닐라 설탕이 없었다. 그냥 평범한 설탕(normal sugar)을 넣느냐, 바닐라 설탕이 없다고 가서 말을 하냐로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다 그냥 설탕을 넣자는 것으로 결정이 되는 듯했는데, 이번에는 노멀 설탕이 바닐라 설탕보다 더 달다, 덜 달다로 불꽃이 튀었다. 그러니 레시피보다 덜 넣느냐 더 넣느냐의 문제가 이어졌다.


펜느는 평소 항상 먼저 웃으며 인사를 해오는 상냥한 친구다. 나를 위해 천천히 말해주고 나의 Broken English를 차분하게 기다려준다. 다른 학생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싶다며 학생회 대표 후보로도 자원해서 나갔었다. 사려 깊은 친구라고 생각한다. 캐롤리나는 조용하고 평소에 말이 거의 없다. 동물을 좋아해서 채식을 하고, 무비나이트 행사 때 상영한 영화가 전쟁 영화라서 보지 않겠다고 했다. 이 친구는 참 무해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두 사람이 지금, 한 사람은 울그락불그락하는 다혈질의 모습을 하고, 또 한 사람은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혈한의 모습을 하고서 첨예한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펜느는 그렇다 치고 평소 말 한마디 없는 캐롤리나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자기주장을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나는 같은 반도 아닌데 어쩌다 싸움 구경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와 부럽다. 이렇게 말싸움할 정도로 영어 잘하고 싶다' 그런 생각도 잠시 했던 것 같다. 우리 반은 영어 안 되는 애들만 모여 있어서 그런지, 누가 의견을 하나 내면 '오- 나이스' 연발에, 이런저런 게 괜찮겠냐고 물으면 모든 것이 '잇츠 오케이'인 애들이라 이런 장면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어찌어찌 모든 것이 결정이 나고 캐롤리나가 계량컵을 들고 자루에서 오트밀을 뜨기 시작했다. 이제 평화롭게 일을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펜느가 계량컵의 숫자를 운운하며 그 양이 맞느니 안 맞느니 가지고 또 한마디를 했다. 캐롤리나가 '이게 맞아' 하고 단번에 잘라버렸다. 펜느가 '하... Ok'하고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뭐, 뭐지... 무, 무서워.... 무나와 나는 눈알만 굴렸다. 하지만 봉지에 오트밀을 나눠 담는 일이 드디어 시작되었으니 다행이었다.


그제야 내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눈에 들어오는지, 펜느가 나를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다 됐어, 우리 싸움 끝났어."


그러자, 대뜸 캐롤리나가 말했다.

"우리 싸운 거야?"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캐롤리나의 순박한 표정이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 찰나에 무나가 덧붙였다.

"싸움이 아니지. 방법을 찾는 거야."


아.

나와 같이 눈알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무나의 대사에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무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싸웠다면 기분이 나빠졌겠지, 너 기분이 나빠졌어?' 하고 펜느에게 물었다. 펜느가 짐짓 쿨한 목소리로 웃으며 '그래, 방법을 찾는 거지'라고 대답했다.


학교에서는 숱한 갈등이 벌어지고 대응하는 모습도 사람 수만큼이나 갖가지다. 사소한 갈등 하나에 학교가 들썩일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아니지, '사소하다'라는 표현 자체가 만드는 2차, 3차의 갈등이 얼마나 많은가. 갈등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려다 더 크게 벌어진 관계는 또 얼마나 많았는지. 그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순간이었다.


갈등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 차원 높은 개념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걸 아이들이 알고 있다면 건강하게 갈등을 다루고 그것의 의미를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인지 갈등의 결과는 늘 상처가 되어버리곤 한다. 어른이고 아이고 발끈해서는 내가 손해보지 않는 방법으로 해결해야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나가 던진 말은 갈등의 의미와 그것을 건강하게 마무리하는 방법을 배운 사람의 대사였다. 저 친구는 저런 대사를 칠 수 있게끔 어디서 어떻게 배운 걸까.  




평화롭게 일이 진행되는가 싶더니, 작은 봉지에 담은 것을 큰 봉지에 몇 개 넣느냐로 또 한차례 하고, 보관을 어디에 하느냐로 또 한바탕 했다. 한마디도 못하고 있던 내가 '내가 뭘 도와줄까?'하고 물으니, 펜느가 '그냥 있어'를 시전. 순간 웃음이 터져서 '그냥 여기 존재하면 돼?' 하니 결국 다들 웃었다.


정작 일은 5분이면 끝날 것을 투닥거리느라 한 시간을 넘게 키친에 있었다.

"나를 불러줘서 고마워. 재미있었다, 싸움 아니고 방법을 찾는 거."

하고 말해주었는데, 다들 킬킬댔다.


캐롤리나가 "We were good!" 하고 외쳤다.

좋은 구경이었다.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뜬금없는 도전으로 나이 마흔세 살에 노르웨이 폴케호이스콜레에 학생으로 왔습니다. 그냥 기록하고 싶어서 일기 쓰듯이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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