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선택과 사랑의 시작
내 인생의 동그라미는 그날 야유회에서부터 다시 그려지기 시작했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전 직원이 함께 야유회를 간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바위에도 걸터앉고 풀밭에도 앉고
편하게 둘러앉아 있었다
남자직원 중 한 명이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았다
간단한 인사말이 끝난 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노래자랑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참가자는 우리 회사 최고의 가수~~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구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내 이름이 불려졌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우리 회사 최고의 가수라고?
한 번도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불러 본 적도 없고 노래를 듣는 건 좋아했지만 부르는 건 자신이 없었다
모든 직원들이 나를 바라보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이크가 손에 쥐어졌고 나갔지만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 한 곡이 스쳤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은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마이크를 통해서 들리는 내 목소리는 괜찮게 들렸다.
며칠 후 의문점이 생겼다.
그 노래를 내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학교에서도 배운 적 없고 누구에게서 들은 기억도 없었는데….
그때 아주 오래된 한 장면이 갑자기 나를 스쳐갔다
햇빛이 비치는 대문 앞에 작은엄마 아들이 기타를 잡고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꼬맹이었던 내가 그 앞에서 있었고
그는 내게 노래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 노래에 실려 내게로 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노래는 참 슬픈 가사였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버지 때문에 씌워진 연좌제가 아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지만
아들은 원망보다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리운 아버지의 얼굴을 동그라미로 수백 번 수천번 그려봤을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켰을까?
노래에 실려 온 그리움이 가슴 한구석을 채우고 지날 때쯤, 나의 일상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일이 익숙해져 갈 무렵 나는 회사에서 가까운 서울보건전문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퇴근 후 학교로 향하는 나의 고단한 생활은 한 남자를 만나면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회사에서 봉사활동을 하러 직원들이 모두 거리로 나갔던 날 알게 된 총무부 남자직원 중 한 명이 나에게 남자를 소개해 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전직 아나운서였고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며칠 뒤 그는 진짜로 사진 50장쯤을 들고 왔다.
모두 부산 사람이었다. 내 눈엔 다 비슷해 보였지만 그중에 괜찮아 보이는 사람을 골랐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그는 내가 고른 사진을 보더니 매우 놀라워했다.
자기가 부산에 근무하는 동안에 한 방에서 같이 하숙을 했던 가장 친한 사람이고 원래 서울에 산다고 했다.
나에게 사람 보는 눈이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비록 서울과 부산에 떨어져 있지만 회사 안에서의 만남이었다. 잘못되면 둘 다 곤란할 수도 있었다.
그 직원이 우체부처럼 편지와 사진을 전해주었다.
얼마 후 서울에 올 일이 있다고 만나자고 했다.
만나기로 한 2일 전쯤 서울에는 오는데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유도 없이 만나기가 어렵다니….
나는 그만 끝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도 같았다.
몰래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이상하고 피곤했다.
편지 속에 그의 사진을 넣어 돌려주고 내 사진도 보내 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모든 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의 장례식에 휴가를 받아서 갔다 온 다음날 아침
슬픔이 아직 나를 감싸고
허탈해 있을 때 회사에서 그를 보게 되었다.
사진으로 봤던 낯익은 사람이 5미터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놀라움과 무엇을 들킨 것 같은 묘한 감정이 엇갈렸다.
같은 층이지만 다른 공간에서 일해서 그 후로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학교 수업 때문에 일찍 퇴근하려던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시 마주쳤다
“시간 괜찮으면 차 한잔 할래요”
나는 바쁘다고 짧게 말했다.
누가 볼까 두려웠다.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후로도 몇 번 마주쳤지만 서로 그냥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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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작은엄마와 같이 잠시 지냈던 때를 빼고는 아무도 내 생일을 기억해 주거나 축하해주지 않았다
그해의 나의 생일은 유난히 추웠다.
문이 닫혀 텅 빈 소공동 지하도를 걸으며 외로움을 느꼈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가오는 사람은 있었지만 아직은 내가 어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함께 입사한 동기가 내게 물었다 그 사람 어떻게 생각해요? 순간 놀랐다 혹시 우리 이야기를 알고 있나? 싶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 친구 당신을 좋아해요 그런데 말도 못 하고 그래서 지금 많이 아파요.”
아프다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지쳐가던 겨울 끝자락 나는 전화를 걸었다.
그의 아버지가 받았다 누구냐? 어떤 사이냐? 끊임없이 계속되는 질문에 나는 다급히 말했다
“같은 회사 직원이에요.
나쁜 사람 아닙니다.”
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건강한 목소리였다.
다시 만난 후 그가 약속을 취소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누나를 잃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후로 우리는 회사 근처가 아닌 조금 떨어진 식당에서 가끔 밥을 먹었다.
언제나 불고기를 사 주며 그가 말했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어”
그는 자신감이 넘쳤고 아주 당당했다. 나는 그게 좋았다.
어떤 일에서도 나를 지켜줄 강하고 든든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마치 좋은 오빠처럼 자상했고 만나면 편안했다.
어느 날은 아버지의 차를 가지고 와서
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운전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하얀 와이셔츠가 아주 잘 어울렸다.
시댁에 처음으로 인사드리러 가던 날
그가 운전하면서 동호대교를 건너는데
세상은 너무 아름다웠고 나는 이 순간이 내 생애에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단 3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회사 사람들은 놀랐다 “그렇게 인기가 많더니 평사원이랑 결혼을 해?” 하지만 나는 세상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도도하고 센 호랑이인 줄 알았는데 너무 여리고 약해서 실망인데”
그게 내 진짜 모습이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겹겹이 입었던 갑옷을 벗고 나니 비로소 연약한 나 자신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