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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바다 Apr 19. 2024

누군가가 죽은 후의 장례식

이번에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모든 일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다고 하지만, 이번 일은 더더욱 그랬다. 그 전날 밤만 해도 그분을 찾아뵈었고, 다음을 위해 행동을 삼갔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일에 후회를 하지만, 이제는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씁쓸하다. 


나는 장례식장이 처음이다. 장례식장이 이런 분위기인 줄도 몰랐고, 이렇게 해야 할 일이 많은 줄도 몰랐다. 많은 사람이 왕래하며 엄숙한 분위기 속 추모가 자리잡은 만큼, 이를 주최한 이들도 조문에 대한 감사로 이에 화답해야 한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 노환으로 인한 작고라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침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에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의 방문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소식이 뜸했던 각자의 오랜 친구분들도 뵌 듯 보였다. 


반면, 이 행사가 장례식이라는 사실을 맞닥드려야 할 때는 분위기가 무거웠다. 사망한 "망자"를 찾아뵐 때, 망자께 수의를 입히는 "염습"을 할때, 망자를 보내는 "발인"을 할 때는 곡소리가 울렸다. 이는 3일에 걸쳐 행해지는데, 신기하게도 이 무거운 행사를 하루에 하나씩 진행한다. 덕분에 하루에 한 번씩은 울게 되었다.


장례식이라는 것은 망자의 마지막을 위한 것보이지만, 사실 남져진 자들의 다른 시작을 위한 보인다. 3일 동안의 3번의 울음은 망자가 부재한 사실을 인정하고, 부재로 인한 슬픔을 맞닥드리며, 슬픔을 해소한 것인 듯 보인다. 


장례식장의 의례를 따라가는 건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갔을 때 레크레이션 일정을 따라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일정은 정해져 있었고 이를 따라가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더욱이 새벽까지 환한 불과 끊이지 않는 사람들의 방문, 그리고 왁자지껄한 분위기 때문에 이것이 축제로 보였다. 한편에 있는 꺼지지 않는 향만이 그 행사가 장례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고인의 장례식은 많은 지인으로 이루어졌다. 망자의 자식은 많으며, 이로 이어진 손주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장례식을 보며 세상의 다른 많은 장례식들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호상(好喪)이 아닌 요절, 사고사, 자살, 타살 등. 그러한 장례식을 치루는 상주와 친인척들은 그 장례식을 어떻게 받아드릴까. 호상이었던, 많은 사람이 찾았던 이 장례식조차 어두운 그늘로 덧씌워져 있었는데 말이다. 


이곳의 장례식엔 분위기 메이커가 있었다. 다행히 그 분위기 메이커는 이곳 장례식에서 받아드려졌다. 분위기 메이커는 제법 술을 많이 마셨는데, 장례식에서 거의 최후까지 쓰러지지 않은 사람이다. 발인 전 마지막 날, 빈소 옆의 의자에서 그가 틀니가 빠진 상태로 자는 덕분에 여럿 사람이 웃을 수 있었다. 


장례식의 그 분위기는 장례식을 주최하는 생자, 방문하는 생자들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이는 망자가 선택하지도 않았고, 선택할 수도 없는 듯 보인다. 장례식의 그 무엇도 망자가 직접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다. 


각자는 어떤 장례식을 원할까. 이는 어떤 이를 만나고, 어떤 관계를 이루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듯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 모임은 제법 활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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