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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만두 Oct 07. 2022

나도 이제는 힘들고 싶어

엄청난 하루가 파도를 쳤다. 눈코 뜰 새 없이 짠물이 강타하는 기분이야. 


허리디스크 통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며칠 전부터 엄마는 위장이 아프다고 했다. 약이 독해서 그랬나 싶었지만 증세를 들어보니 엄마가 어릴 때부터 아팠다고 한 '담도' 문제인 것 같았다. 


담도·담관에 염증이 있거나, 결석이 많아지면 위장 통증과 상당히 비슷하다. 열도 살짝 나고. 엄마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것이 위장병인 줄 알았지만 삼십 대가 넘어서야 담도 문제인 걸 알았다고 했다. 




09:46

엑스레이로 확인할 수 없는 부위라 이번에도 MRI나 CT촬영을 해야 했다. 엄마는 오늘도 대학병원 예약까지 기다릴 수 없는 아픈 상태. 나도 오늘은 집으로 갈 수 없다. 집 근처 CT장비가 있는 병원을 검색해 카카오 택시를 집으로 보냈다. CT찍으려면 공복이어야 할 테니 굶고 가라고 알려주고서, 혹시나 대기시간이 길어지거나 촬영을 못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 죽도 조금 덜어서 챙겨가라고 당부했다. 


10:16 

엄마 병원 도착. 건강검진 가능한 병원이라 환자가 많았고, 병원에서는 건강보험공단 위 내시경 대상자라며 수면내시경도 권유했다고 했다. 간 김에 하는 건 좋은데 혼자서 수면내시경 괜찮을까. 너무 걱정됐다. 수면 마취약도 엄마에게는 너무 독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11:20

남편과 통화를 했다. 남편은 중요한 점심 선약 때문에 연차를 써둔 상태였다. 취소하기 어려운 약속이었을 텐데, 그래서 정말 전화하기 싫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은 단숨에 엄마에게로 가주었다. 전화 통화를 끊고 눈물이 나는 걸 꾹 참았다.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점심을 어떻게 먹었는지. 오늘은 11시, 1시 회의가 있었고 3시에는 업체 미팅이 있었다. 중간중간 화장실로 달려가 통화를 하며 발을 굴렀네. 진동소리가 무서웠다. 


14:24

남편에게 전화가 와서 회의 끝나자마자 또 화장실. 병원에서 폐에 이상이 있다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갑자기 무슨 폐?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폐에 물이 찬 것처럼 보인다면서. 아니 CT 찍으러 갔는데 엑스레이는 왜? 엄마를 바꿔달라고 했다. CT를 못 찍었단다. 대체 왜? 조영제를 못 넣었다고 하는데 혈관 문제구나 싶었다. 엄마는 혈관이 약해서 피 뽑는 것도 일이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보호자로 따라다니며 '제발 저 선생님은 혈관을 바로 찾게 해 주세요' 기도 하고는 했다. 


15:03

다행히 3시 미팅에는 내가 들어가지 않아도 됐다. 다시 전화기를 들고 빈 회의실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혈관을 1시간 동안 못 찾다가, 겨우 하나 찾아서 조영제를 넣는데 팔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간호사들이 달려와서 보니 혈관이 터져버린 것. 약 넣다 혈관이 터진 경우는 나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엄마는 팔이 퉁퉁 부었다며 병원에서 붕대로 압박해주고 내일까지 풀지 말라고 했다고 했다. 남편이 엄마 곁에 있어줘서 너무 다행이었다. 


15:11

폐에 물이 차면 나타나는 증상을 검색해보는데 해당되는 게 없다. 기본적으로 호흡이 불편하거나 기침을 해야 하는데, 엄마가 아픈 건 강도 높은 복부 통증과 약간의 발열이었다. 담도에 문제가 있을 때 나타나는 증상 맞는데…그 엑스레이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코시국에 호흡기내과 진료 보려면 48시간 전 코로나 음성 확인서도 지참해야 했다. 나는 빨간 날이 두렵다. 금요일에 엄마가 아플까 항상 졸이며 살았다. 공휴일에는 병원이 문을 닫잖아. 시간과 돈을 아끼려면 나는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어느 병원에 갈까. 어디 먼저 갈까. 내가 의존할 수 있는 건 검색뿐이다. 읽고 읽고 또 읽는다. 비교해가면서 읽는다. 처방전을 들여다본다. 카페에 가입한다. 하지만 오늘 저 병원을 선택했던 건 실수였다. 


16:03

엄마에게 한번 더 전화를 걸어 최근에 숨이 빨리 찬다거나 기침을 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정말 없대. 엄마 생각도 나와 같았다. 우선 대학병원 소화기내과로 먼저 가자. 가장 빠른 예약일인 18일까지만 우리 버텨볼까. 엄마는 진통제를 처방받아왔다고 그러자고 했다. 가여운 엄마. 10대부터 60대까지 약을 안 먹는 날이 없네. 허리디스크 약은 안 먹으면 또 다리가 아플 텐데. 그건 또 어쩌나. 배달앱을 켜 엄마 집으로 죽을 배달 시켜줬다. 한숨 돌리고 나니 오후 4시네. 




그리고 지금 18시 41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앉아서 타임라인을 복기했다. 하루가 너무 또 길었다. 옆에는 복싱 가방이 놓여있고 나는 복싱장에 갈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아까 오후 5시 즈음, 누군가 내게 "어머님이 아프신데 대리님까지 힘들면 안 돼요 오늘 맛있는 거 먹어요!" 위로를 하는데. 


아뇨. 이제 나도 좀 힘들고 싶어요. 라는 대답이 나왔다. 동료들이 ㅠㅠ슬픈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처지길래 말을 돌렸지만. 나도 이제는 힘들고 싶어. 


나보다 더 힘든 엄마를 앞에 두고 

안 힘든 척하는 게 아니라 

건강하고 힘 있는 엄마에게

힘들다고 말하고 싶다. 


내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효녀라고들 하지만 

아뇨, 효녀 안 하고 싶어요 나도.

엄마가 우리 딸은 

왜 저렇게 철이 없냐고 놀렸으면 좋겠어요.


약국도 병원도 문을 닫는 빨간 날 앞으로 퇴근하기 무섭다. 이 일기는 언제쯤 웃으며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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