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이라는 '비효율'이 주는 위대한 배움

AI는 결코 이해 못 할, 우리 아이들의 시끄러운 구원

by 온설


혼자 가면 빠르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 참 근사합니다. 하지만 막상 '협력'의 현장에 뛰어들어 보면 이 말은 종종 낭만적인 포장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현실에서의 협력은 사실 지독하게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협력은 가성비가 떨어지는 작업입니다. 혼자 결정하면 5분이면 끝날 일을, 의견을 조율하고 감정을 살피느라 5시간, 혹은 5일이 걸리기도 하죠. 마치 최신형 고속열차를 두고 굳이 여러 명이 발을 맞춰야 하는 '2인 3각' 경기를 하는 꼴이랄까요? 하지만 우리는 왜 이 느리고 답답한 과정을 반복해야 할까요?



우리는 효율성을 따질 때 투입된 시간과 에너지를 '비용'으로 계산합니다. 그러나 협력에서 발생하는 시간의 지연은 단순한 소모가 아닙니다. 서로의 다른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쏟는 그 '비효율적인 시간' 동안, 우리는 나라는 좁은 세계관을 확장하는 전문 용어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확보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혼자서는 절대 보지 못했을 내 뒤통수를 타인의 눈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정답이 누군가에게는 오답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사고는 비로소 입체적으로 변합니다.



인공지능(AI)이 아무리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도 따라오기 힘든 영역이 바로 인간 사이의 유대와 맥락입니다. 알고리즘은 최단 경로를 찾아내지만, 협력은 때로 '최선이 아닌 경로'를 택함으로써 예상치 못한 통찰을 선물합니다.

효율성: 직선으로 긋는 최단 거리

협력: 구불구불하지만 풍경을 모두 담아내는 곡선

이 곡선을 그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공감(Empathy)과 인내(Patience)라는, 기계가 가르쳐줄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근육을 키우게 됩니다.



완벽하게 매끄러운 구슬 두 개는 서로 맞닿을 뿐 섞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친 표면을 가진 존재들이 서로 부딪히고 깎여나가는 비효율적인 마찰을 겪을 때, 비로소 견고한 결합이 일어납니다. 협력이 주는 가장 위대한 배움은 '나의 부족함이 타인에 의해 채워질 수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우리가 함께일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는 겸손'입니다. 효율성이라는 잣대로만 세상을 본다면 절대 만날 수 없는 귀한 깨달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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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조별 활동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여러 편의 단편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 조마다 흐르는 공기가 다르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선택하는 '길'도 제각각이죠.



어떤 조에는 발군의 실력을 가진 '에이스' 한 명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지치지도 않고 조 전체의 프로젝트를 이끌어갑니다. 결과물은 놀랍도록 빠르고 정교하죠. "힘들지 않았니?"라는 물음에 아이는 덤덤하게 대답합니다.


"애들 설득하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게 훨씬 편해요. 흐름도 안 끊기고요."


경제학적으로 보면 이 아이는 '최적화(Optimization)'를 달성했습니다. 의사결정 비용을 제로로 만들고 성과를 극대화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효율적인 결과물 뒤에서, 나머지 아이들의 '배움의 기회'는 조용히 소멸합니다. 결과는 성공했지만, 과정은 단절된 상태. 이것은 협력이 아니라 정교한 '대리 수행'에 가깝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주제를 고집하다가 배가 산으로 가는 조들이죠.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아이는 서서히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어차피 내 말은 듣지도 않는데, 알아서들 하겠지."

이때부터 활동은 고역이 됩니다. 조별 내 분화가 일어나고 갈등은 심화되며, 조가 깨질 위기에 처하기도 하죠.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 붕괴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삐걱거림'이야말로 갈등이라는 수업의 가장 중요한 교재가 됩니다. 나라는 우물 밖으로 나와 타인의 세계와 충돌하며 발생하는 파열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몸소 겪고 있는 중이니까요.



가장 아름다운 조는 가장 느린 조일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두고 지루한 토론을 이어가고, 조금씩 양보하며 의견을 섞어가는 조들입니다. 이들은 효율을 포기하는 대신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획득합니다. "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그럼 우리 이렇게 섞어볼까?"라는 투박한 대화 속에서 아이들은 타인의 생각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합니다. 결과물은 조금 늦을지 몰라도, 그 안에는 조원 모두의 영혼이 깃든 '우리'의 것이 담깁니다.



교사로서 18년, 저는 이제 깨닫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매끈한 결과물'을 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독하게 비효율적인 협력의 과정'을 견뎌내는 힘을 길러주는 데 있다는 것을요. 혼자 해서 얻은 100점짜리 결과물보다, 서로 부딪히고 깨지며 얻은 80점짜리 결과물이 더 위대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전자는 '기술'을 남기지만, 후자는 '사람'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아이들은 칡과 등나무처럼 엉키며 자라고 있습니다. 그 비효율적인 소란함이 사실은 가장 치열한 배움의 현장임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