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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비 리즈 Feb 05. 2023

50+에는 이렇게 살고 싶다.

4. 이별의 두려움에 맞서고

 이른 아침 지인에게 모친상을 알리는 문자를 받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추위 때문인지 어르신 부고 소식이 잦다. 예전엔 부모님 부고였지만 이젠 선배 혹은 친구의 본인 부고도 있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친분과 상관없이 부고를 받으면 마음에 슬픔이 찾아온다. 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하러 찾아가서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숨을 고른다.   


 이별은 슬프고 아픈 일이다. 많은 이별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슬픔에 익숙해지는 것은 어렵다. 이별의 이유가 죽음이든 변심이든 힘들다.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겠지만 그 아픔은 존재한다. 또한 이별은 슬픔과 아픔을 동반하고 찾아온다. 나 역시 이별이라는 말에 하루의 즐거움을 통째로 날려버린 날도 있다. 먹는 것도, 숨 쉬는 것도 버거웠던 날이. 


 나에게 어느 계절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어렵다. 과일을 좋아하는 내겐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좋아하는 계절과일을 즐길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래도 골라보라 하면 6월에 태어났기에 여름이 좋다. 6월엔 따뜻한 봄기운과 뜨거운 여름 햇살이 피부에 닿는다. 뜨거운 공기를 식혀줄 소나기가 한바탕 내리는  것도 좋다. 또는 하얀 안개꽃 송이가 내리는 것 같은 눈 내리는 겨울도 좋다. 4계절과 어떤 날씨도 상관없다. 단 스산한 가을바람에 비까지 내리는 날이 아니라면. 언니가 떠나던 날을 소환하는 날씨가 아니라면 4계절 어떤 날이라도 괜찮다. 그날 난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이별을 경험했다.  


 어릴 때는 친구의 ‘너랑 안 놀아’의 한 마디가 이별 통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별 통보 효력은 단 하루인 경우가 많았지만, 하루가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혼자된다는 것이 제일 두려웠다. 친구 관계가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기에 나도 또래 아이들처럼 친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친구가 세상의 전부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바꿀 정도로. 

 절교와 화해를 셀 수 없이 경험했다. 글을 쓰면서 왜 싸웠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고 했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팠다’는 감정은 남아 있지만 사건에 대한 세세한 기억은 몽땅 사라졌다. 다행이다. 아팠던 어린 시절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꼭 그렇지 않았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든다. 


사무치게 힘들었다고 기억할 사건이 없음에. 

그리고 상처가 옅어져 기억에 남아있지 않음에. 

이젠 그 감정도 잘 정돈되어 가고 있음에. 


 남녀와의 이별 경험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다. 사람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 예민했던 나는 철벽녀(철벽처럼 연애를 차단하는 여자)였다. 선 긋기를 좋아하는. 친해지면 가족 이야기를 했지만 내 비밀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 이야기하면서 언니를 제외하기 싫었고, 언니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에 사람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난 후 우리 가족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신뢰감이 필요했다. 지금 내 옆에서 가장 든든한 기둥이 된 남편에게 처음 언니 이야기를 했다. 신뢰할 수 있었고 내 아픔을 그대로 인정해준 사람이다. 대학에 들어가 미팅 한번 해보지 못하고 난 기혼녀가 되었다. 결국 연애 한 번에 결혼 한 번이니 흔한 남녀와의 이별 경험은 없다. 감사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오해는 하지 말자. 결혼을 후회한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연애 경험이 있었으면 지금의 남편이 가장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결혼하고 더 큰 가족을 이룬지 25년이 지났다. 아이들은 20대 중반이고 남편은 50대 중반, 양가 부모님은 80중반이다. 감사하게도 양가 부모님은 도움 없이 생활하실 정도로 건강하시다. 노화로 인해 체력 저하가 있고 신체 기능이 떨어졌지만,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겠다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하신다. 당신들 걱정보다 자식들 걱정이 더 많으신 분들이다.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힘들 때 투정 부릴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다는 것으로도 행복하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결혼했다. 살림을 배운 적도 없고, 해본 적도 없었다. 교회 살림을 도맡아 하시던 시어머니셨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며느리에게 한번도 “왜 그렇게 했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는 음식을 잘하고 너는 애들 가르치는 거 잘하니, 네가 잘하는 거 하면서 살라”

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였다. 살림 잘하시기로 소문난 어머니는 며느리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그렇지만 다 품으셨다. 아버님은 말씀이 없으셨지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웃음으로 답해주셨다. 의견을 구하면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세상 사는 방법을 말씀해주신다. 


 직장생활을 하셨던 친정 부모님은 딸이 양육과 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수업으로 아이들 유치원에 데리러 갈 수 없는 상황에는 부모님이 아이들을 픽업해주셨다. 일을 마무리하고 데리러 갈 때까지 돌봐주셨다. 아이들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는 일부터 크고 작은 일을 도와주셨다.

 아이들은 엄마인 내가 키운 것이 아니라 양가 부모님의 헌신으로 컸다. 언젠가 친정엄마가 

“딸~ 엄마는 네가 양가 부모님이 생존해있는 걸 생각하면 너무 기뻐. 그런데 연배가 비슷해서 네가 한꺼번에 슬픔을 겪게 될까 봐 많이 힘들다.”하며 눈물을 보이셨다. 


 나도 두렵다. 부모님과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길게 주어지지 않을까 봐. 

 작은 아들이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양가 부모님을 뵈러 갔던 날이 떠오른다.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가는 작은 아이 눈에 근심이 가득했다. 아이가 무겁게 말을 했다. 

 “엄마, 할아버지가 나 스페인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실까?” 이 말에 아이의 마음이 느껴졌다. 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할아버지를 만나고는 

 “할아버지, 내가 올 때까지 딱 10kg만 쪄야 돼. 나랑 약속하는 거야”라며 기어이 약속을 받아냈다. 

 아이는 2년 전 가장 친했던 친구가 하늘나라로 갔다. 군 복무 중이었던 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친구가 가는 길을 지키지 못했다. 나보다 먼저 친구의 죽음을 경험한 아이의 말에는 두려움이 담겨있었지만 담담하게 받아드리려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김형경 작가는 <좋은 이별>에서 이별 후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잘 이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좋은 이별을 위해서는 상실을 직면하고 슬픔을 표현해야 하고, 상실을 수용하는 애도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어린 아이는 친구와의 절교 정험이 있고, 연애를 하면서는 실연의 아픔이 있고, 부모를 떠나보내면서 이별을 경험한다. 이별 혹은 상실의 문제가 잘 해결한 경우도 있지만 오랜 시간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치료되지 않은 이별의 아픔을 경험했고 상실이 심리적 문제의 원인인 내담자를 만나면서 애도에 대해 공부했다. 


 애도(哀悼, 죽은 사람을 슬퍼함)는 주로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 등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상실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이별이나, 갑작스런 이직이나 큰 변화 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애도 과정에 대해서도 학자마자 다르게 이야기하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애도 이론은 1969년에 퀴블러 로스의 상실의 5단계 이론이다. 로스는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5단계의 과정 중 한 과정이 생략되기도 하고, 한 과정에 머물러있는 시간이 긴 경우도 있다. 또, 두 가지 부정적 감정이 섞여 나타나기도 하며 단계가 퇴행되기도 한다. 즉 좋아졌다가 나빠졌다 등의 굴곡을 거치며 기능을 점차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애도 상담과 관련된 공부는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언니와 잘 이별했을까? 언니가 떠나야 했던 이유도 이해되지 않았고, 그 시간에 머물며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위로하려고 했다. 첫 번째 이별은 좋은 이별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애도 작업을 통해 좋은 이별이 되었다. 그리고 내 마음은 평안을 찾았다. 


 지난 12월 31일 송구영신 예배에 참석했다. 나는 결혼하고 지금까지 시부모님과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지만 아버님도 예배에 참석하셨다.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보고 계신 부모님을 보니 눈물이 났다. 최근에 아버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마음 아팠는데 성가대석에서 아버님과 눈이 마주치자 내 눈엔 눈물이 흘렀다. 2023년 기도 제목을 내려다 봤다. 제일 첫 번째 기도 제목에 ‘부모님 건강을 주님께서 지켜주세요’라고 쓰인 글씨가 눈물로 뿌옇게 보인다. 나의 가장 큰 기도 제목이다. 


 익숙한 이별은 없지만 좋은 이별을 하고 싶다. ‘계실 때 더 잘 할걸’이라고 후회하고 싶지 않다. 보고 싶을 때 많이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가족이 내 곁에 없을지라도 지난날 있었던 작은 사건조차도 웃으며 나눌 수 있는 추억을 만들고 싶다. 우정 반지를 나눠 손가락에 끼우듯 우리 끼리로 묶을 무언가를 공유하고 싶다. 어쩌면 나는 완벽한 이별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이별의 두려움에 맞설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 나눔으로 가장 행복한 이별을 준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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