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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비 리즈 Feb 05. 2023

50+에는 이렇게 살고 싶다

3. 나,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아침부터 분주하다. 할 일도 많고 챙겨야 할 사람도 많은 날이다. 일은 순서에 따라 진행되고 중요한 것만 결정하면 되니 마음이 편하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들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오전에는 각기 다른 사연으로 노숙하게 된 20대 중반부터 70세 이전의 노숙인 내담자를 만난다. 오후에는 사회복지사례관리 회의에 참여해 대상자에게 맞는 서비스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현장 실무자를 만나야 한다. 결국 도움이 필요한 분들과 도움을 주려는 분들을 만나는 것이다. 


 내가 상담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현재보다는 과거를, 행복보다는 불행에 대해 말한다. 또한 나보다는 다른 사람, 있는 그것보다는 없는 것을 이야기한다. 상담할 때 나는 자원 발굴자가 된 것 같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안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발견하려고 땅을 파낸다. 단단한 바위를 만나면 폭약을 사용해 날려버리고 싶지만 버텨줄 힘이 없으니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내담자의 손을 잡고 작은 망치로 살살 바윗덩어리를 깨며 전진해 나가야 한다. 극한의 상황이 와도 내담자의 손을 잡고 버텨야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슬프고 힘들다는 말만 듣는데 행복하지 않겠다고. 힘들다는 말을 듣다 보면 나쁜 에너지가 몸에 쌓이겠다고. 결론을 말하면, 그렇지 않다. 변화하는 내담자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음과 변화의 과정을 함께 걸어갈 수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 드는 날이 더 많다. 그들과 나는 다른 역할을 하며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일 뿐이다. 사실, 이 일은 내 인생에서 제외된 길이었다. 내가 이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이었다. 


 언니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2학기 가을, 부모님은 언니 교육을 위해 지방에 있는 특수학교로 전학시키기로 하셨다. 차가운 비바람이 불던 가을 어느 날, 언니는 준비해 둔 새 가방과 예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엄마 손을 잡고 떠났다. 그날 철없던 나는 새 가방과 분홍 원피스를 입은 언니가 부러워 떼쓰며 울었다. 시간이 지나고 알았다. 언니는 이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후 부모님이 언니를 생각하며 우는 모습을 자주 봤다. 부모님은 언니의 교육만 생각한 게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나와 오빠가 언니랑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받게 될 상처를 걱정하셨다. 두 자녀를 위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첫 아이를 떠나보내는 것을 선택하신 것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언니 몫까지 다 하겠다고 다짐했고, ‘부모님이 울지 않게 하겠다.’고 나와 약속했다. 그리고 난 순종적인 아이가 되기로 했다. 거절하지 않는 아이가 되기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나 부모님께 의견을 물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 부모님이 제시해 주시는 것을 그대로 따랐다. 부모님과의 모든 약속은 지키고 내게 주어진 일은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학교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나보다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아이였다.


 하지만, 난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하라는 부모님과 지인들 의견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언니를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얘기했다. 

“아픈 언니를 위해 하라고.” 

싫었다. 


 치열하게 싸우고 고집을 부려 부모님이 원하던 전공과는 다른 쪽으로 선택했다. 대학에 들어가 우연한 기회에 저소득층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봉사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고민을 듣고 같이 해결하는 것도 보람 있었다. 그 속에서 행복해하는 나를 보게 되어 당황스럽고 놀랐다. 단지 ‘같이’ 있어 주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변해갔다. 마음을 열었고 조금씩 다가왔다. 


 언니도 그곳에서 다른 아이들을 돌보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언니를 돌보지 못한 점은 미안했지만, 언니에게 도움을 주었던 누군가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그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을 간직할 수 있게 되길 기도했다. 


 돌고 돌아 결국 나는 사회복지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면서 관계를 회복했고 죄책감에서 벗어났다.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살아가던 내 삶도 달라졌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했다. 내게 집중할수록 편안해졌고 솔직한 내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을 가둬두었던 ‘죄책감’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길을 찾아 공부하며 결혼하고 16개월 차이 연년생인  두 아들의 철들지 않은 엄마다. 아이들과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을 상상했지만, 현실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랩을 따라 하고 소파에 터프하게 다리를 걸치고 축구를 응원하고 있다. 두 아들은 딸 노릇하는 두 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따뜻하고 배려할 줄 아는 아이들이다. 이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까지 쉬웠을까? 절대 아니다. 


 작은 아이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이다. 지금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아마도 그 아이는 짜인 틀을 요구하는 엄마와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해는 하지 말자. 그래서 저 멀리 스페인 땅으로 날아간 건 아니다. 둘째는 친구, 게임을 좋아하다 보니 귀가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눈치와 애교가 많아서 크게 부딪치는 일은 없었지만,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힘들었다. 

 아이를 위해서 뭐든 할 것처럼 그렇게 노력도 했지만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다닐 정도의 시간은 없었다. 학교는 아이가 다니는 것이라는 원칙이 있었기에 극성 엄마는 아니었다. 다만,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며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었고 그 시간만큼은 듣는 것에 집중했다.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 


 상담하면서 나는 여러 가족과 많은 문제를 만났다. 어느 날 청소년 자녀와 갈등하며 상담실에 찾아오신 부모님이 “내가 어떻게 했는데”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 안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너를 위해’라는 말로 아이를 가두고 싶지 않았고 자식을 위해 희생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내 아이들도 엄마의 희생으로 행복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  


 아이들이 여물어가면서 나도 익어갔다. “아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라는 말에 “엄마가 행복해야 아들도 행복해”라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말에 답을 찾았다. 내가 나를 위해 존재할 때 누군가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이모겐 로이드 웨버는 <나를 위해 산다는 것>에서 ‘스스로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 소중한 인생을 만든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금까지 부모님을 위해, 자녀를 위해서라고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 아닐까? 작가의 말처럼 나의 선택이지 않았을까? 


 심리학자 융의 개념 중에 그리스 시대 연극에서 배우들이 역할에 맞춰 쓰던 가면을 말하는 ‘페르소나’가 있다.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맡은 역할에 따라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의미한다. 결국, 나는 20대는 부모님의 순종적인 자녀 가면을, 30대와 40대는 교육자인 완벽한 엄마의 가면을 선택했다. 누구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었고 나의 선택이었다. 

 지금까지 사회에서 원하는 가면을 착실하게 쓰고 산 것은 아니지만 가면을 벗어버리고 완벽한 나라는 존재로 살아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무채색이 아닌 옷을 한 벌 사야겠다, 열정적으로 살겠다는 의미로 빨간색의 정장을 사볼까? 내가 어떻게 해도 누구의 딸, 누구의 엄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전에 나라는 존재가 있다. 50+에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고 가장 나다운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느끼며 살고 싶다. 


 나는 바란다. 

 나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행복하길.

 그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나를 사랑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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