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나무연필, 2018)를 읽다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그 자리는 당사자가 아니라 당사자의 ‘곁’이다. 고통은 고통을 겪는 이가 아니라 그 곁에 있는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중략)
고통의 당사자는 절대 고통을 말할 수 없는가? 반드시 남을 필요로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 말은 당사자의 ‘위치’에서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 당사자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위치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중략)
고통의 당사자가 자신의 곁에 서는 것, 그것이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말은 곁의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중략)
글을 읽고 쓰는 것을 통해 사람은 고통받는 타인의 곁뿐만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자기의 곁에 설 수 있다. 글쓰기는 고통의 당사자가 (중략) 자기 자신의 곁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세계를 구축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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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책은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나무연필, 2018). 용감한 사람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고통의 무시무시한 실존을 정면으로 긍정할 수 있는 이만이 이런 책을 쓸 수 있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고통의 사회학’이자 ‘고통의 인류학’이며 ‘고통의 생물학’이자 ‘고통의 언어학’이다. 이 책은 고통에 대한 질문들을 모든 시간에, 모든 장소에서, 모든 형태로 묻고 또 물으면서 사유를 중첩시킨다.
타자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고통받는 이들을 이해해 보려는 가족들, 친인들, 그리고 수많은 활동가들처럼 저자는 고통 안으로 들어섰다가, 고통의 절대적 심연을, 원초적 접근 불가능성을 깨닫는다.
“넌 내 고통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형이상학 또는 종교를 동원해 고통을 초월하지도 않고, 고통에 좌절하거나 절망해서 세속적 위로에서 그치지도 않는, 언어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바위를 또다시 밀어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말이다.
언어를 고통의 속으로 들여보내는 게 아니라 고통의 곁으로 이동시키는 서사적 방향전환. 이는 문학연구자들 사이에서 ‘오뒷세우스의 역설’로 잘 알려진 것이다. 오뒷세우스는 자신이 몸으로 겪은 고통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노래를 듣고 비로소 자신의 누구인지 확실히 깨달았다는 것이다. ‘허구의 역설’이라고도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표현하려면,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타자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이로써 이 책은 ‘고통의 문학’이 된다.
이 책을 통해 한국어가 비로소 고통의 철학을 갖게 되었다.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나는 분명히 이 책을 올 한 해 동안 백 번은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