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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주원 Sep 13. 2016

행복은 어디에나 피어나는 민들레 같은 거예요.

페친으로 세계일주_김경현

  “경현씨가 겪어온 무게는 제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삶의 무게가 아닌 것 같아요.”

  강원도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경현씨의 이야기를 듣다가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가 겪어온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쉽사리 어떤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런 나를 보고 그가 말했다.

  “남의 팔 잘린 고통보다 내 팔에 살짝 흉터난 게 더 고통스러운 법이에요. 원래 자기 삶이 제일 무겁고 아프고 힘들잖아요. 다 각자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이 있는거죠. 전 괜찮아요.”


  그의 치열했던 삶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내 삶이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보다 어린 나이지만 그가 견뎌내야 했던 삶의 무게는 나보다 훨씬 컸다. 그래도 그는 이야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다시 재결합한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가족이 재결합하기까지 그는 사람들로부터 도망다니며 살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사업 때문에 큰 빚이 생겼고, 그 빚이 갚지 못할 만큼 불어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건 돈 앞에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계속 늘어나는 빚은 한 가정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안타까운 건 그가 군대에 있을 때 이런 사건이 터졌다는 것이다. 형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탈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집을 떠났고,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돼 몸져눕고 말았다.

  그는 전역을 하고 한동안 술에 찌들어 살았다. 순식간에 변해버린 환경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자신에게 시련을 안겨준 하늘을 원망했고, 세상을 비난했다. 분노와 슬픔과 자괴감에 빠졌지만 그렇다고 그 감정들을 풀 수 있는 창구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몸져 누워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그의 형과 그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빚을 갚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일터로 나갔다.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하루 종일 힘들게 일을 했다. 돈을 꽤 많이 준다는 소식에 세차장에서도 한 번의 휴일 없이 계속 일을 했고, 잠시 형과 아버지의 곁을 떠나 배를 타며 일을 하기도 했다. 일을 하는 동안에 가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시간도 사치였다. 일단 눈앞에 있는 불부터 꺼야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던 도중, 집을 떠났던 그의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안하다. 경현아.’

  어머니의 말을 듣고, 그는 소리 내어 울 수밖에 없었다. 미운 감정보다는 자신을 다시 찾아준 어머니에게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그렇게 그의 가족들은 다시 재결합할 수 있었다. 비좁은 원룸에서 4명의 식구가 모여 살게 되었지만, 공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따스함의 크기는 공간의 크기보다 훨씬 컸다.

  가족의 재결합이 너무 감사했다. 그는 그 감사함을 매일 되새기기 위해 전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에게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를 하루에 꼭 3번씩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 말이 너무나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처음이 어렵지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너무나도 좋아하셨다.

  하지만 가족의 재결합이 빚까지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빚은 여전히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휴학 기간이 길어져 언제 재적을 당할지 모르지만 복학을 할 여유도 없었고, 그런 사치를 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빚과의 싸움을 계속 해나가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내내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이 좀 어때요? 그래도 힘들진 않아요?”   

  그가 대답했다.

  “한 때는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어요.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큰 짐을 가지고 살아야 되나 하면서요.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삶 속에서 내 미래에 대한 불안도 커졌구요. 빚을 갚으려면 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야겠다 싶었어요. 그러다 내가 얼마나 이 짓을 더 해야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 계산해봤죠. 나랑 형이 한 푼도 안 쓴다는 가정 하에, 10년 동안 정말 개처럼 일을 해야 이 빚을 다 갚을 수 있겠더라구요. 무려 10년 동안이요. 그래서 그때부턴 생각을 달리 하기로 했어요. 그냥 빚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내 삶의 여유를 조금씩 찾아가자. 빚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삶도 조금씩 되찾아가자. 그래서 요즘엔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사람들도 만나러 다니고, 예전엔 사치라고 생각했던 영화나 뮤지컬도 가끔 보러 다녀요. 지금도 이렇게 주말에 커피숍에서 주원씨하고 이야기하는 게 저는 정말 행복해요.”

  그래도 예전보다 마음이 많이 괜찮아졌다는 그는, 삶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려 노력했다. 우리에겐 일상일 수 있는 그런 일들이 그에겐 하나의 행복이었다. 더불어 사랑한다,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부모님이 곁에 있고, 나와 같은 사람을 소개 받아 만난다는 것도 예전에는 누릴 수 없는 기쁨이라고 말했다. 남들이 보기엔 정말 힘들고 불행할 수밖에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환경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환경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반응이 결정하는 거구나.’



  난 전역을 하고 바로 대학으로 복학할 수가 없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학비뿐만 아니라 매달 지출될 생활비도 필요했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열심히 모은 월 8만원의 봉급들로 내 생활을 이어가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택한 게 호주 워킹홀리데이였다.

  당시에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한국에서 무슨 유행처럼 번져갔다. 호주를 가면 1억을 벌어온다, 호주를 갔다 오면 영어가 쑥쑥 늘어서 온다는 식의 소문이 내 귀를 팔랑거리게 했다. 나는 생각했다. 

  ‘여기서 편의점 알바 하면서 최저시급을 받느니, 호주가서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리고 난 곧바로 편의점 야간 알바를 시작했다. 호주행 비행기 티켓을 사기 위해서였다. 3달 동안 알바를 하며 번 돈으로 호주 경비를 마련했고 그렇게 내 호주생활이 시작됐다.

  시드니의 공항에 도착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난 이제 정말 혼자구나.’ 둘째, ‘내 주머니엔 70만원 밖에 없구나.’

  어물쩍거릴 시간이 없었다. 한국에서 미리 알아둔 스트라스필드라는 한인 타운으로 이동해서 숙소에 짐을 풀었다. 월세를 내고 나니 내가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길어봐야 한 달이었다. 짐을 풀자마자 호주의 일자리를 소개해 놓은 한인 커뮤니티에 접속해 일자리를 찾았다. 일단 단기 아르바이트라도 뛰어야 했다. 첫 이틀은 공장 청소, 그 다음 2주는 이삿짐 센터에서 일을 했다. 이삿짐 센터의 사장은 한국 사람이었다. 하지만 덩치가 작다는 이유로 난 이삿짐 센터에서 짤리고, 타지에서 같은 한인으로부터 일자리를 잃었다는 비통한 심정으로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다. 다시 미친 듯이 일자리를 검색하다 찾은 것은 골프리조트 하우스키퍼였다.

  전문적으로 청소를 해본 적도 없고, 방 정리도 잘 못하는 나였지만 군대에서 갓 전역했다는 패기를 앞세워 사장에게 어필했다. 수많은 경쟁력을 뚫고, 그렇게 난 하우스키퍼가 됐다. 지금도 신기한 게 30평쯤 되는 방을 어떻게 나 혼자서 1시간 안에 다 정리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3달이 지나자 온갖 화학약품에 손이 걸레가 됐다.

  손이 걸레가 될 시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호주의 최저시급보다 못한 월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주를 가면 한국인을 조심해라.’라는 사람들의 조언이 떠오르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남들은 놀러 온다는 호주에서 일만 하고 있는 내가 씁쓸하기도 했지만 생활비라는 호주에 온 이유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또 다시 일자리를 찾았다.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이동한 곳은 멜번이었다. 그곳에서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단열재를 깔았다. 단열재는 유리가루가 촘촘히 박힌 유리섬유였다. 그걸 깔다보니 온 몸에 작은 유리가루들이 박혀서 한동안은 따가움에 잠을 설쳤다. 그렇게 4달 동안 단열재와 씨름하다 마지막으로 서호주에 위치한 포트헤드랜드로 이동했다.

<4시간을 자며 투잡을 뛰던 호주생활>

  그곳에서는 하루에 4시간을 자면서 맥도날드와 콜스에서 투잡을 뛰며 돈을 벌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 밥을 먹어야했기 때문에, 식사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단백질 보충제와 시리얼을 섞어 먹는 생활을 4개월 동안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몸무게가 72kg까지 내려갔다. 그 전의 몸무게는 아마 82kg정도 됐을 거다.

  그렇게 10개월 정도가 지나고 귀국했다. 중간에 한국인 사장 아래서 삽질하느라 돈을 못 모은 것 치고는, 1300만원이라는 꽤 큰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누가 보면 영락없는 외국인 노동자였다. 돈을 벌기 위해 때로는 비굴해져야했고, 부당한 대우에 그저 묵묵히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언제가 가장 행복했어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당당히 ‘호주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라고 대답한다.

  물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간 호주 워킹홀리데이였다. 근데 갔다 와서 내게 더 크게 남은 건 돈이 아니라 행복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치열하게 살았고, 육체적으로 힘들게 살았다. 하지만 호주에서의 10개월은 나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들로 기억된다. 과거를 미화하는 게 아니라 당시에도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행복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 매일 똑같은 모자와 똑같은 신발과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녀도 그 누가 손가락질 하지 않았다. 작업이 끝나고 거지같은 꼴을 하고 레스토랑에 가도 쪽팔리지 않았다. 눕고 싶을 때 길바닥에 드러누워 낮잠을 잤고, 더우면 티셔츠도 걸치지 않고 돌아다녀도 상관없었다. 속된 말로 내 꼴리는대로 행동했다. 그때만큼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둘째,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호주에서 평생 살 것이 아니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시간 당 21달러를 주던 호주에서는 내일 먹고 살 것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풀타임이 아니라 파트타임을 뛰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다. 직업의 귀천도 없었다. 노가다는 시간 당 40달러를 주고, 탄광은 50달러를 준다는 소식에 오히려 그런 일들을 하고 싶어했다. 하루 빡세게 일하고 땀을 뻘뻘 흘리고 집으로 돌아와 냉동실에서 꺼내 마시는 맥주가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남는 시간엔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하거나, 근처 바다로 나가 낚시를 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버스킹을 구경하거나, 집에서 파티를 열어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내일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미래에 어떻게 하면 성공할지 쓸데없는 계획을 세우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됐다. 그저 하루 주어진 하루를 살았고, 다가오는 내일을 맞이했다.

  난 분명 행복했다. 누군가는 나를 돈을 벌기 위해 호주로 떠난 안쓰러운 청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행복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달려 있었다. 행복은 내게 주어진 상황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해석하고 반응하는 내 자신에게 있었다. 어느 환경이든 행복은 존재했다. 이게 내가 호주에서 1년 동안 산전수전을 겪으며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물론 경현씨가 지고 있는 빚의 크기는, 내가 호주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했던 상황보다 훨씬 무거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힘듦과 고통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스스로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 들이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어진 사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어떤 태도로 일관할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빚더미에 앉은 불쌍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법정을 드나들어야했고, 또래 친구들에 비해 겪어야 했던 고통들이 많았지만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반응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는 빚이라는 것에 얽매여 살았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그렇게 살아가지 않기로 선택했다. 빚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로 선택했고,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사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빚이라는 힘든 상황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99%의 힘든 상황보다는 1%의 희망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꿈을 품고 있었다. 좌절을 딛고 꿈에 대한 희망을 품으며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제가 힘들 때마다 시를 썼어요. 사실 시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긴 한데. 그냥 뭐라도 쓰지 않으면 제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거든요. 근데 그렇게 하나 둘 시를 쓰다 보니 시를 쓰는 게 제 삶의 즐거움이 됐어요. 쓰면 쓸수록 점점 관심이 가더라구요. 그래서 요즘에는 시간을 내서 시를 배우러 다녀요. 나중에 시집을 한 권 내는 게 제 꿈이거든요.”

  삶의 고통 속에서의 희망, 그 희망이 가져다주는 작은 행복. 그 작은 행복을 따라 나아가다보면 삶의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은 정말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지금 당신이 밟고 있는 땅이 척박할지라도 행복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어느 곳에서든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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