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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짤리짤리 Nov 16. 2022

서울민국의 중심, 강남

격차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지역


이어짐.


 격차의 확대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관계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수도 서울 내에서도 강남과 비강남의 격차는 두드러졌다. 강남은 의미적으로 서울의 서쪽 끝 강서구에서 동쪽 끝 강동구까지 이어지는 한강 이남 전 지역을 포괄할 수 있지만, 통상 좁은 의미에서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세 개의 행정구역이 강남 3 구라 불리고 있다.

 (강남. 서초는 송파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강남구 조차도 테헤란로를 기준으로 테북, 테남이라 불리며 다시 갈리기도 한다.)  


 개발 초기 이 땅은 남서울이라 불렸고, 이후 한강 이남에서 가장 번화했던 영등포의 동쪽이란 의미로 '영동'이란 이름이 널리 쓰였다. 그리고 1975년에 이르러 서야 정식 행정 구역명으로서의 '강남'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최초의 강남구는 지금의 강남 3구는 물론 강동구까지 포괄하고 있었다.  

 본래 경기도에 속했던 이 지역이 서울로 편입된 것은 1963년이었다. 당시 영등포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강 이남 지역은 녹지나 농지였고, 나룻배가 강을 잊는 주요 교통수단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강철교와 대교 외에는 광진교가 전부였던 다리는 65년 영등포와 마포를 잇는 양화대교(당시 제2한강교로 불림)가 추가되고, 1969년에 이르러서야 경부고속도로와 연계되는 한남대교(제3 한강교)가 건설된다.

 이후 1970년대는 한강에 가장 많은 교량이 생겨난 시기였는데, 70년대 추가된 8개 한강 다리 중 5개가 강남 지역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강남이 주거지와 업무지구로서 본격 개발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한강 이남지역 개발이 시작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한국전쟁 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인구였다. 1955년 157만 명에 불과했던 서울의 인구는 1966년이 되자 두 배가 넘는 379만 명에 이르렀고, 폭발적 증가 추세는 1990년 1,000만 명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만들어낸 높은 출산율과 먹고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감당하기에 서울이란 도시는 작고 인프라는 열악했다.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주택보급률은 턱없이 낮았다. 곳곳에 생겨나는 판자촌과 슬럼가는 강, 녹지, 공유지를 잠식하며 번져갔고 이로 인한 주거환경이나 위생 문제 역시 심각해져 갔다. 준비할 겨를 없이 맞이했던 서울의 과밀화였다. 정부는 기존 도심을 중심으로 한 주변부 확장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한강 아래 넓게 펼쳐진 미개발지 영동 지역에 대한 대대적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서울 인구 변화


 강남의 새 주거지는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개발된다. 지금처럼 가장 선호도 높은 주택형태여서가 아니라, 대량의 주택을 계획적이고 신속하게 공급하기 위함이었다. 한국형 신도시 개발의 시작점이다. 단지형 아파트의 첫 입주 대상은 공무원들이었는데 '강남 신축 아파트 분양권'이라고 생각하면 엄청난 혜택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만 생각하진 않은 듯하다. 초기 입주자들은 미분양을 채우기 위해 떠밀리듯 들어온 이들도 적지 않았고 이사를 오고도 오래 살지 못하고 다시 강북으로 돌아간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상업지구나 편의 시설은커녕 변변한 대중교통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과 10여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강남의 아파트들의 위상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고 발 빠른 사람들에겐 투기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격동의 시기였다.


 강남이 서울로 편입되고 주택을 공급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강 이북의 주요 도심과 그 주변부로만 몰리자 군사 정부 특유의 거침없는 추진력으로 강남을 위한 특혜들을 쏟아낸다. 강북에 소재한 명문 학교들이 강남 곳곳으로 이전되었고, 고속버스터미널 같은 중요 인프라나 행정기관도 강을 넘어 내려왔다. 민간 개발을 유도하기 위해 강남 토지의 용적률 제한을 완화하고, 투자나 이전을 하는 기업들에게 세제 혜택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와 반대로, 강북에서는 새로운 주택지, 백화점, 학교 등 사람들이 모일 만한 시설 개발을 제한하는 등 억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강력한 정책들은 점차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프라가 확충되고 교육환경이 좋아지고, 기업들이 터를 잡으며 일자리가 생겨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히 지하철 2호선의 개통은 교통여건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키며 인구 유입에 불을 지폈다. 증가하는 거주자에 따라 도로망과 대중교통은 지속적으로 확충되었고, 다양한 상업, 문화 시설들이 생겨나며 지역의 선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신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쾌적한 주거환경과 넓은 도로, 명문 학교와 직주 근접의 혜택까지 갖추어지니 강남의 아파트들은 어느덧 누구나 선호하는 거주지로 부상했다. 급격한 지가상승이 따라왔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위한 대대적인 인프라 확장 및 개발 사업들 역시 한강 이남 지역에 집중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종합운동장, 대형 공원, 선수촌 아파트들과 이 새로운 인프라들을 공항까지 빠르게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도로였다. 지금의 올림픽 주경기장, 올림픽공원, 올림픽대로 들이다.


 80년대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의 3저 호황으로 시중에 쏟아지는 돈들은 강남의 눈부신 성장세를 부채질했고, 1990년대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이제 강북과 강남 간의 역 격차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강남은 단기간에 많은 것을 빨아들이며 돈과 사람이 몰리는 새로운 서울의 중심이 된 반면, 정체된 강북은 점점 노후화되어가고 있던 것이다. 이는 이 두 지역의 경제 총생산량, 부동산 가격, 등록 법인 수등 모든 지표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역 격차 해소를 위한 서울 균형발전이 화두로 떠올랐고 도로망 확중, 버스 전용차선 도입, 하천 복원 등 상징적이고 굵직한 서울시의 사업들이 대부분 강북 지역을 중심으로 시행되게 된다. 강북 지역 곳곳을 아우르는 뉴타운 사업도 그중 하나였다. 노후된 주거지역을 사람들이 선호하는 대단지의 아파트 지역으로 개발하여 강남에 버금가는 주거환경을 만들겠다는 취지였다. 이는 부동산 가격을 자극했고 지역구별로 뉴타운 지정 요청이 쇄도하며 정치인들의 선거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000년대 들어 강남. 강북 간의 부동산 가격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뉴타운 사업은 이명박에서 오세훈으로 이어지는 보수성향 서울시장 계보로 추진되어 오다 2008년 미국 서프라임 위기로 인한 부동산 시장 침체와 사업성 악화로 곳곳에서 차질을 빚게 된다. 이후 더딘 부동산 경기의 회복과 진보성향의 서울 시장의 연임이 겹치며 다수의 재개발 사업 계획이 해제되기에 이른다. 박원순 시장이 대안으로 내세운 정책은 도심재생사업이었다. 노후 지역을 부수고 새로 짓는 대신, 수리하고 단장하는 이 방식은 대단지의 새 아파트를 원하는 시장 수요에 매칭이 되지 못했을뿐더러, 어떤 가치를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부재한 채로 진행된 탓에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양질의 신규주택 공급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와 2017년 이후 서울의 아파트 가격 폭등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집중이 잘못일까?

 특정한 곳에 사람과 자원이 집중되는 문제는 어느 단위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 문제이기도 하다. 서울만 바라보면 강남의 쏠림현상이 문제가 되지만, 나라 전체를 보면 수도권 집중현상이 문제이고, 전 세계로 시야를 넓히면 뉴욕, 런던, 상하이 등과 같은 소위 엘리트 도시들을 중심으로 돈과 인재들이 몰리며 경제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도시 외각 지역에 대규모 시설을 필요로 했던 제조업 중심의 성장을 지나, 인재 중심의 지식경제로 넘어오자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쏠림 현상 역시 어떤 면에서는 발전의 단계적 과정이며 시대적 흐름으로 볼 수도 있다. 해체와 억제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강남은 여전히 가장 많은 직장이 있고, 가장 우수한 학군을 제공하고, 교통이 우수하며 역내 환경이나 치안 또한 양호하다. 여러 면에서 선호되는 지역이기에 높은 부동산 가치로 연결된다. 심지어 다른 지역의 부동산 가치도 강남과 얼마나 빠르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좌우될 정도로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거주 목적뿐만 아니라 가치 보존을 위해 돈을 묻어두는 장소로 선택되기도 한다.

 빈부의 격차가 커질수록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인적 위험 요소가 적은 안전한 장소로 모이려고 할 것이고, 비혼 및 1인 가구의 증가 또한 직주 근접에 대한 선호도를 높일 수 있다. 유인 요소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수요를 억누르고 분산시키려 한들 효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사한 정책들이 계속되는 이유는 대한민국이 고속 압축성장을 해온 덕에 정책적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과거 강북을 억제하고 강남을 키워온 과정을 몸소 겪어온 세대들이어서 일지 모른다. 시대적 배경이나 환경이 전혀 달라졌음에도 과거의 성공경험에 매몰되어 다른 답을 구하려 하지 않는 걸까.


 주택 가격 자극 등을 이유로 핵심지의 재개발 재건축은 억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린벨트까지 해제해가며 외각에 신도시를 추가 공급하는 것이 과연 시대 흐름에 적합한지도 의문이다. 강남에 재건축을 어렵게 하는 것은 공급을 제한함으로써 강남 주택을 더 희소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고, 신도시의 확장은 더 많은 사람들이 원거리 통근을 위한 추가적인 시간과 에너지를 치러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새로운 도시를 이어 줄 도로나 철도망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것에도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니 사회 전체의 비효율이 증대로 이어진다.

 일찍이 현대적 도시가 형성되었던 미국의 사례를 보면, 고속 성장기 대규모로 형성된 중산층들이 보다 쾌적한 생활을 위해 새로운 교외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겨가고 기존 도심 곳곳은 낙후되고 일부는 우범지역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구도심 재개발 붐과 함께 사람들이 다시 회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기존 구도심의 거주자들이 외각으로 밀려나는 것이 바로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신도시를 확장하는 추세에 있기 때문에 주거지보다는 상업지에 대한 젠트리피케이션만 부각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세계 최저의 출산율로 인구가 감소하고, 교육 등의 문제로 떠나갔던 사람들이 회귀하기 시작한다면 그 많은 위성도시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가까운 일본처럼 일부 신도시는 공실률이 늘어나고 노인들만 남게 될 수도 있다. 마치 모자이크처럼 경쟁력을 지닌 지역만 정상적인 기능이 유지되고, 외면받는 지역은 방치되며 지역 간 경계와 격차를 지금 보다 더 선명하게 벌려 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은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며 성장한다. 훗날 이 시기를 돌이켜 보면 수요를 분산하려 애쓰기보다, 수요가 있는 곳에 양질의 공급을 만들기 위한 고민이 더 필요했었던 시기로 여겨지지는 않을까.



PS. 강남의 학원가는 왜 대치동에 생겨났을까?

강남구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테헤란로를 기점으로 테헤란로 북쪽이란 의미의 '테북'과 남쪽 지역 '테남'으로 나누어진다.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삼성동 등으로 대표되는 테북지역은 부촌으로 자리 잡으며 기업가, 고위 공무원 등 상류층이 많이 모여들었다. 기존 강북 도심으로의 접근성이 좋고 한강과 가까운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테북지역은 상대적으로 대형 평형의 아파트가 많았고, 넓은 마당을 가진 단독주택들이 아직까지도 곳곳에 모여 있다. 강남에 출점한 백화점들도 태북지역에 터를 잡았다. 반면, 지리적으로 다소 불리했던 테남 지역 대치동, 개포동, 일원동 등지에는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중소형 아파트들이 집중 건설되었다. 이러한 초기 거주자들의 특성은 사교육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테북지역은 자녀들에게 주로 과외시키거나 유학을 보내려는 수요가 많았고 테남 지역은 학원을 보내려는 수요가 많았다. 자산가 계급이 아니라면, 학벌을 통해 전문직으로 올라서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테남 지역을 중심으로 학원가가 형성되었다. 다른 대표적 학원가인 목동이나 중계동 역시 서민이나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들이 대량으로 공급되었던 지역이다. 이러한 방식은 신도시에도 번져나가 분당, 일산 , 평촌 등지에도 지역 학원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최근 새로 생겨나는 신도시에는 과거처럼 대형 학원가가 형성될 것 같지는 않다. 저출산으로 인한 절대적인 학생수 감소, 온라인 강의 확산 그리고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회사에 취업하는 사이클을 표준으로 삼기 어려워진 환경적 변화 등을 꼽을 수 있다. 자녀들은 이미 세상의 변화를 인지 하고 다양한 삶의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지만 부모들의 변화는 더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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