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벤트가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렸다. 세계 최정상급 프로 바둑 기사 이세돌과 구글의 자회사 딥마인드가 개발한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 간의 대국이었다. 서양의 대표 보드게임 체스는 이미 인공지능이 인간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지 오래이지만 바둑은 그 수가 훨씬 다양하고 난도가 높아 아직 인공지능이 따라오지 못하는 영역으로 여겨졌다. 적어도 이세돌과의 대국이 있기 한 해 전 가을, 알파고가 유럽 바둑 챔피언 판 후이를 상대로 5-0이라는 완승을 거두기 전 까지는 말이다. 이 대국은 인공지능이 최고 레벨의 프로 바둑기사를 상대로 공식적인 승리를 거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알파고의 다음 상대가 이세돌로 알려지자 세계의 많은 언론들이 그에게 많은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우려와 달리 그는 '판 후이는 유럽 챔피언일 뿐, 세계 무대에서 최고의 바둑기사는 아니다.', '나는 자신이 없다, 질 자신이 없다'라는 말들을 남기며 여러 인터뷰를 통해 자신감을 내비쳤다. 사람들의 관심 속에 어느덧 그는 마치 인공지능에 대항하여 인간을 우위를 증명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세돌 vs 구글 딥마인드 대국 결과
하지만 그는 알파고에게 완패했다. 1,2,3국을 내리패하고 4국에서 극적으로 승을 거두었지만 5국에서 다시 지고 말았다. 5전 1승 4패라는 이세돌의 성적표는 단순한 이벤트 이상을 의미했다. 알파고를 대상으로 거둔 1승은 화려한 이력의 프로 바둑 기사로서 자손심을 지켜주고, 대중에게 작은 위로가 돼주었지만 우리는 인공지능이 열어갈 새로운 세상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음을 실감해야만 했다. 자기 학습을 통해 놀라운 속도를 발전해 가는 인공지능은, 대회 전 막연하게 가졌던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을 두려움으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중 가장 큰 걱정은 과연 인공지능이 우리의 직업을 얼마나 대체해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 대국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부쩍 늘어났고 관련된 강연, 서적등의 콘텐츠 인기가 치솟았다. ' 0년 내 사라질 직업' 같은 자극적인 타이틀로 클릭의 유도하는 기사들이 급증하기도 했다.
기술 발전에 대한 노동자 저항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19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났던 러다이트 운동을 들 수 있다. 공장제 수공업 방식으로 운영되던 생산 현장에 방직기로 대표되는 기계들이 개발되고 도입되기 시작하자 기존 수공업 숙련공들은 기계와의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대량생산은 자본가들에게 더 많은 부를 축척할 기회를 제공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결코 달가울 수 없는 변화였다.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나온 공장 노동자들은 저임금 일자리라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삶의 질 악화에 따른 노동 계층의 불만은 러다이트 운동이라는 기계 파괴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본질적으로는 자본가 계급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자 계급의 저항이었지만 파괴되어야 할 대상은 사회 구조가 아닌 기계를 향했고 실제 기계를 부수기도 했다. 의도된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지배계급은 대중의 시선을 자신들이 아닌 다른 쪽으로 돌리려 한다는 의심을 종종 받곤 한다.
시간이 흘러 오늘날 사람들은 4차 혁명을 이야기한다. 이 혁명이 특별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마치 첫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때처럼 노동시장의 급격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4차 혁명이 어느 속도로 또 어디까지 자신들의 삶을 바꾸어 놓을지 알지 못한다. 보이지 않으니 더 불안하다.
인공지능은 이미 인간이라는 경로를 통하지 않고도 스스로 소통하고 발전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단순 정보 제공 형식의 언론기사들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송출하고 있을뿐더러 특히 영어권 국가에서 저렴한 인건비를 이유로 해외로 외주를 주었던 콜센터 들도 AI 로이 대체가 시도되고 있다. 정형화된 문제와 답이 있는 모든 사무 업무들은 빠른 속도로 인공지능에 잠식당할 수 있다는 리포트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100도씨에 도달한 물은 급격히 성질을 바꾸며 바글바글 끓어오르기 시작하듯, 대중의 관심은 다소 소강되었다 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인공지능의 발전은 지금도 계속되며 온도를 높이고 있다. 어떤 계기로 임계점에 도달하기 시작하면 급격하게 우리 삶에 변화를 주기 시작할 것이다. 스마트폰의 탄생이 빠른 속도로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은 것처럼 말이다.
직업 그리고 돈벌이는 어느 때 보다 중요해졌다. 대가족을 이루며 살던 농경사회에서는 일상적인 일들을 서로 의지하며 함께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이 상업화되고 개인화된 지금은 세탁, 육아, 이사 등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일들은 서비스 구매를 통해 해결한다. 다른 가족을 위해 희생할 일들이 줄기는 했지만 반대로 자신이 어려움을 겪더라도 십시일반 도와줄 형제나 친인척들이 없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의무에서 벗어나는 대신 지불 능력으로 평가받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노동 소득이 전부인 사람들에게 직업은 삶을 지켜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래서 일자리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다.
다수가 전망하듯 감성적이고 창의적인 분야는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면,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소수의 사람들과 타인의 콘텐츠를 단순 소비만 하는 사람들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질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주도하여 결과물을 만들기보다, 누군가에 의해 요구된 업무를 수동적으로 처리하던 대규모 화이트 컬러 집단들은 과거에 습득한 지식을 부여잡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마치 공장에 기계가 도입되던 시절 숙련공들이 그랬듯 누군가는 진지한 고민을 할 여유도 없이 당장의 호구지책을 찾아 길거리로 내몰릴지도 모른다.
기술 발전이 인류의 삶을 망쳐 왔을 리 없다.
큰 변화는 진통을 수반하지만 시계열을 길게 보면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에 성공한 국가 국민들의 평균적 삶의 질은 급격하게 좋아졌다. 1,2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육체적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며 급격한 생산력 증대를 이뤄냈고 잉여 노동력을 통해 다양한 서비스 산업이 발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산업 발달은 기본 학력을 갖춘 관리자의 수요 또한 증가시켜, 일부 특권층에서만 이뤄졌던 교육이 대중화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지금이야 중고등 교육을 필수로 여기지만, 몇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체계화된 정규 교육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서민층 자녀들은 유년기부터 노동현장에 이끌려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며 몸으로 익히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인류라는 집단으로서의 진보와 개개인의 삶은 다른 문제 일수 있다. 변화 속에는 단기적으로 수혜를 입는 집단과 피해를 입는 집단이 공존한다. 국가 경제가 성장했다고 해서 모든 국민에게 혜택이 동일하게 돌아가지도 않는다. 멀리 보면 우상향 했더라도 그 속에는 늘 크고 작은 굴곡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각 구간구간을 보면 삶이 악화되는 시기가 있었고 개선되는 시기가 있었다. 빈부 격차가 확대되는 시기가 있었고 감소되는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개개인의 삶은 큰 시대의 흐름 속 어느 구간, 어느 집단에 위치하는 가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던 농경사회에서는 농부의 자식들이 농부로 살아가는 것처럼 대체로 예견된 삶의 경로를 따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산업혁명이 촉발한 빠른 사회 변화는 사람들에게 예측하기 어려운 삶의 경로를 가져다주었고 삶의 불안정성 확대되었다. 물질적 풍요와 함께 불안감이 따라왔다.
산업화 초기 기계화 물결이 자본가와 노동자 간 격차 확대를 불러온 것처럼, 금융 산업 발전이 빚을 보편화시키며 소수의 금융재벌을 만들어 낸 것처럼, 인공지능 역시 이를 활용하여 혜택을 얻는 소수의 사람들과 그 밖의 다수 간의 격차를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가게 될까. 실제 많은 직업이 사라지면 저 숙련 일자리라도 얻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고 노동 환경이나 조건이 악화될까. 새로운 소식들은 지금까지 좋은 방향으로 흘러왔던 것들이 커다란 변곡점을 넘어 악화로 방향을 튼 것이 아닐까 라는 물음을 재촉한다. 과거 사이보그와 인간의 대결 구도를 그린 SF소설이나 영화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그 이면에 로봇 발전이 촉발하게 될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불안이 있었듯 지금 사람들은 인공지능 앞에 다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