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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빌 언덕 Nov 02. 2020

공감의 조건

상담실 이야기

(사진 - unsplash.com)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해주는 공감은 한없이 달콤하다.


상담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세상에서 자신의 아픈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서럽고 반가운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해받지 못해 외로운 감정이 쏟아져 나왔고, 마음의 빈자리는 따뜻하게 채워졌다.


그가 조금 기운을 차리면서 어떤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와 상관도 없는 상담 선생님도 나를 이렇게 이해해 주는데,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더 서로를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한 번 만져진 외로운 마음은 계속 또 다른 만남과 소통에 목말라 했다.


어떤 날 그가 상담실에 유달리 밝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지난주에 우연히 SNS에서 자신과 비슷한 아픈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짧은 대화 속에서도 너무 많은 공감을 주고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일은 직접 만나서 차도 마시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설레어하는 내담자의 감정을 건드리기 싫었고, 만나서 어떤 경험을 하든 그것 역시 그가 살아가는 그의 인생이므로 내가 앞서 관여할 것은 없었기에 격려만 해서 보냈다.


그다음 주 상담날이 다가오자 그가 당분간 상담을 좀 미루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새로 만난 그 사람과의 이야기와 경험이 지금 자기에게는 너무 중요하고, 평생 해보지 못한 큰 감정들을 주기 때문에 당분간은 그 관계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우리의 상담 경험이 좀 더 오래 지속되었고, 그래서 어떤 일정한 궤도에 오른 상태였다면, 그 내담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도 그 경험을 그때마다 나와 나누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담은 아직 짧았고, 그는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에 푹 빠져있었다. 나는 그를 응원할 뿐이었다.


그렇게 내담자가 상담실을 떠나갔다. 그리고 두 달 후 그는 의기소침하고 낙담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차분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은 경험이 같아서 공감이 쉬웠다. 긴 설명도 필요 없고, 서로가 나누는 감정은 진실했다. 누가 누구를 내려다볼 입장도 아니고,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니라는 생각에 외로움이 사라져 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나눔이 깊어지면서 관계는 애매해졌다. 과거를 나눌 때는 모든 것이 공감대였는데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서로의 공감대가 깨져나갔다. 한 사람은 과거를 품고 살아가고자 했고, 한 사람은 과거를 잊고 살아가고자 했다. 나의 내담자는 상담 경험이 있었기에 그 사람에게 어설픈 상담자 역할을 하려고도 했고, 그 사람은 선을 넘는 모습에 아주 불쾌해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다투는 상황에서 서로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방법도 잘 알았다. 관계는 짧고 아프게 끝났다.


나의 내담자는 더 큰 좌절에 빠졌다. 공감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공감을 받고도 뭔가가 채워지지 않았다. 자신을 공감해주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니 더 아팠다. 전에는 홀로 방황했으나 이제는 함께 길을 잃었다. 그러나 기특하게도 그 힘든 상황에서 나를 다시 찾아와 줬다. 적어도 몇 개월 사이 나눈 우리의 상담이 그래도 쓸모없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다시 수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의 변화에 대해 전보다 더 섬세하게 알아채는 면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큰 경험뿐 아니라 작은 경험에 대해서도 잘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표현은 정확하고 세련되어서 그와 똑같은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도 그의 경험을 생생하고 공감되게 잘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경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관계에 있어 거리를 탐색할 줄 알고, 관계의 종류를 다양하게 나누게 되었다. 험담은 친구에게 할 때 가장 재미있고, 고민은 상담자에게 나눌 때 가장 좋고, 고백은 애인에게 할 때 가장 달콤했다.


그는 어떤 한 사람에게 진한 공감을 받고 싶은 무리한 열망으로부터 빠져나와 수많은 사람들과의 작고 섬세한 교감에 더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공감대가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늘 즐거웠지만, 공감대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해와 수용의 경험을 넓혀나가는 것은 감격적이기도 했다.


과거의 경험에만 집착하지 않으니 현재의 경험들이 차곡차곡 충실히 쌓여갔다.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소재들이 다양해지고, 인간관계는 넓어졌다. 단칸 셋방 같던 그의 마음이 정원 딸린 주택이 되어 갈 무렵 우리의 상담은 끝이 났다. 나는 그에게 상담실로 다시 돌아온 것을 고마워했고, 그는 나에게 상담실에서 기다려준 것을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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