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많지도 적지도 않은 과거의 연인들은 굉장히 다양한 사유로 나와 어긋나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나는 종교인이니 일요일은 종교활동에 매진해야해. 너는 무교니 당연히 이해해줘야해' 였고, 다른 하나는 '당연히 결혼하면 내 직장 근처로 네가 옮겨야지. 결혼하면 당연히 애 낳고 키워야하니까 너는 직장다니기 좀 그렇지. 어디서든 개국 할 수 있으니까 지방가서 약사할래?' 였다. 모두 21세기에 이뤄진 대화들이였고, 2년 이상 만난 자들이였다. 난 문과다.
2.
엄마는 나만 보면 한동안 '당연히 네 나이가 되면 결혼해야하는거 아니냐?'라며, 자연의 섭리를 들먹이며 짜증을 내곤 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처치하지 못한 자식을 보니 스펙적으로 잘 키워놔도 항상 미완의 상태로 보였나보다. 자식새끼 속사정도 모르면서. 속 편한 사람마냥 '풍뎅이가 쩍짓기하면서 식장을 예약하나?'라고 낄낄대며 받아쳤다가 정말 죽을 뻔했다. 키워봤자 소용 없다고.
3.
말은 내뱉지 않았지만 나 역시 '당연히 평생의 연을 맺는다면 너랑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 사람 간의 관계에 허들이 높고 의심도 워낙 많은 편이다보니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될거라 확신했는데, 이러저러한 사건들로 인해 절대 이뤄질 수 없게 되면서 '당연함'에 대한 확신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4.
지구가 탁자같이 생긴 게 당연한 시절이 있었다. 너무나도 사실이라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고 했다가 큰 화를 당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성춘향과 이몽룡의 십대로서의 뜨거운 사랑은 '문학'이 되었지만 21세기에는 '현장르포'가 될 판다. 중국 여성의 겨털은 미의 상징이였지만 미국 여성의 겨털은 질레트 면도기의 숙청대상이였다.
나의 교육과정에는 '상대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라'는 내용이 있었지만, 그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세대가 이를 활자 수준으로만 가르치다보니 여전히 마음 어딘가엔 당연하지 못한 것을 맞이했을 때의 감정적 어색함이 남아있다. 누군가는 그래서 화를 내고, 짜증도 내지만, 다른 건 다른거다. 심지어 우리가 과학이라 칭하는 것조차 백년 뒤에 반례가 나타날 지 모를 일이다. 이 현실을 언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는 시기가 달라진다 생각한다.
5.
의식적으로 '그건 당연히 @@아니냐' 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1차적으로 타인을 위해서지만,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해서이다. 당연한 정답에 연연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나를 지지하려고. 대충 보면 박쥐 같이 보이겠지만(동생이 욕 많이 한다) 난 이게 오히려 세상을 넒게 생각하고, 타인을 헤아릴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이라 굳게 믿는다. 나만의 중심을 찾고 표현하는 연습만 더 해서 박쥐의 오명을 잘 벗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