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15분, 평소보다 조금 일찍 전철에 오른다. 이 시간의 열차는 일찍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가능한 구석으로 눈치껏 몸을 옮겨 사람들 사이에서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한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홈 화면에서 메모장을 연다. 회사가 있는 여의도 역까지 앞으로 45분, 오늘의 첫 엄지로 글쓰기가 시작된다.
작은 노트북을 샀던 건 3년 전의 일이다. 뭐라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몇 날을 망설이다 잘 깎은 연필과 공책을 찾아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이내 지난 몇 년간 회의시간 메모 말고는 손으로 뭔가를 적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헤밍웨이에게는 헤르메스 타자기가 있었다지만, 나에게는 컴퓨터 키보드가 필요했다. 며칠을 고민해서 주문한 날씬한 노트북을 받아 들었을 때, 이 기계로는 인터넷도 하지 않고 글만 쓰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 기계로는 아무 글도 쓰지 않고 인터넷만 했다.
대신 지금 나는 엄지로 글을 쓴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핸드폰의 앱을 열고 한 줄이라도 더 적으려 손가락을 움직인다.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게 바라보는 순간도 있지만, 끈기 있게 한 단어 한 단어 내 머릿속의 문장들을 5인치 작은 화면에 꺼내어 놓는다. 내가 주로 쓰는 글의 길이는 공백 포함 3000자, 11줄짜리 문단 9개면 보통의 수필 한 편이 완성된다. 솜씨 없는 엄지 손가락이라지만, 이때만큼은 좁은 핸드폰 자판을 요리조리 옮겨 다니며, 머릿속을 떠돌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처음 핸드폰을 택한 것은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잊지 않고 메모해 두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적혀진 한 줄 두 줄이 제법 속도가 붙어 열 줄을 넘어가기 시작했을 때, 굳이 뒤로 미룰 것 없이 거친 초고라도 적어두자고 생각했다. 멋진 글을 쓰기 위해 집에 가서 목욕재계 해봐야, 잠만 오기 일쑤였다. 대신 쓰고 싶은 아이디어가 생겼을 때 한 줄이라도 저장해 두면, 글 한 편의 완성에 한 걸음 다가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이렇게 불현듯 찾아온 30자짜리 한 문장이 감사하게도 나머지 2970자를 이끌어 내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핸드폰에 엄지로 글을 쓰면서 나는 큰 수고 없이 매일매일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따로 시간을 내어 책상 앞에 앉을 때까지 미루는 것이 아니라, 틈만 나면 짬짬이 습관처럼 한 줄 한 줄을 적게 되었다. 출퇴근길 전철에 서서, 혼밥 하는 식당에 앉아, 은행에서 대기번호표를 뽑아 들고, 짬을 내어 틈틈이 메모장을 열어 어제 적어둔 글의 꼬리를 이어가게 되었다. 써놓은 글들을 고치고, 자르기와 붙이기로 문장의 순서를 바꾸며, 한 글자 한 글자를 더해 공백 포함 3000자를 향해 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매일 아침 원고지 40장을 쓸 필력은 꿈도 꾸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꾸준히 매일 5인치 핸드폰 화면의 한 바닥을 채우는 것으로 나의 하루는 소소한 성취의 연속이 된다.
내가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엄지로 글을 쓰면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은 대충대충 글을 써도 좋다는 스스로의 허락이다. 낙서 하나 없는 빨간줄 원고지에 흑청색 잉크로 밤새 써 내려간 글이 다음날 두 번 읽기도 창피할 만큼 형편없다면, 아무리 뻔뻔한 나라도 낙담하고 다시 글쓰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지로 글을 쓰는 어설픈 환경은 '이만큼 쓴 것도 다행이네'하며 엉망진창인 나의 창작물에 관대해질 수 있는 넉넉한 핑계가 되었다. 어차피 좋은 글쓰기는 기승전 퇴고이다. 그렇다면 결함투성이의 초안은 퇴고를 위한 완벽한 준비물이다.
읽어줄 사람이 없는 글을 쓴다는 것은 지루한 근육훈련이다. 검사해줄 선생님이 없더라도 숙제처럼 11줄짜리 문단 9개를 완성한다. 이 과정을 통해 머릿속의 글감을 화면 위의 글자로 바꿔 내는 생각의 근육을 키운다.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말을 하루 종일 하고 다녔으니, 나만 듣는 메아리 같은 글쓰기에 특별히 실망할 것도 없다. 입으로 뱉어낸 내 말들은 곧 사라져 버리지만, 엄지로 적어낸 내 글들은 다행히 메모장에 저장되어 읽어줄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적어두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내 삶의 스냅샷을 남겨 두는 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다. 소재가 무엇이건 결론이 어떤 내용이건, 한 문장 한 문장이 그 장면을 살아 내었던 나에 대한 기록물이다. 그 글을 썼을 때의 내 생각과 마음속 감정을 담아 둔 그 시절의 나에 대한 설명서이다. 그래서 오늘 내가 적은 이 글도 훗날의 나에게 보내는 메세지가 된다. 미래의 내가 이 글들을 읽으면서 맘에 썩 들지 않는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까탈스러운 독자가 기다리고 있는 셈이니, 악플이 두렵다면 그가 잘 이해하도록 친절하게 써두는 편이 좋겠다.
밤 12시45분, 어제보다 조금 늦게 잠자리에 든다. 오늘 하루 미처 읽지 못했던 메신저의 빨간 숫자도 클리어했고, SNS 친구들의 새로운 소식들에 꼼꼼하게 '좋아요'도 눌렀다. 이제 모로 누워 잠이 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어야 15분, 오늘의 마지막 엄지로 글쓰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