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옷이응 May 16. 2021

초판 1쇄 본을 사는 마음

e북 시대 초판의 의미




<중쇄를 찍자>라는 제목의 일본 드라마 시리즈를 정주행 했다. 최근 들어 전 세계를 뒤흔드는 K-웨이브 혹은 한류문화 콘텐츠 가운데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분야 중 하나가 TV 드라마라고 한다. <킹덤>이나 <더 킹, 영원의 군주>, <스위트 홈> 같은 국내 드라마들이 전 세계 영상 콘텐츠가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무한 경쟁하는 넷플릭스류(類)의 플랫폼에서 선전하는 걸 보면, <맥가이버>처럼 배한성 아저씨가 더빙한 외화드라마를 보고 자란 나로서는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뭉클해진다. 비약적인 발전을 한 우리나라 드라마에 비하면, 일본 드라마들은 과거의 어떤 시점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헐리우드의 거대 자본이 생산해내는 미국 드라마들과 굳이 경쟁하려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신 예전의 우리 드라마와 제법 닮은 친근한 소재들이 다루어지고 있어서, 외국 드라마인데도 큰 이질감 없이 오히려 익숙한 옛날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시간이 날 때 종종 보게 된다.
 

日 TBS 드라마 <중쇄를 찍자> (2016년) 쿠로키 하루 주연


<중쇄를 찍자>는 만화잡지를 발행하는 출판사를 배경으로 편집자와 만화가들이 만들어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만화라는 창작물을 만화가가 아닌 편집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재능 있는 만화가를 발굴하고 관리하면서 좋은 작품으로 채워진 만화잡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극한직업의 출판사 편집자 버전 정도인 흥미로운 이야기 열 개가 이어진다. 출생의 비밀도, 멋진 남녀 주인공의 러브라인도 없지만, 만화 출판사라는 그들만의 업계 이야기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중판출래 (重版出來)’라는 일본어를 번역한 것인데, 초판을 찍어 책을 인쇄한 뒤, 책의 반응이 좋아 처음 인쇄한 부수가 다 팔리게 되면 두 번째 판을 찍는 것을 뜻하는 출판업계의 용어이다. 덧붙이자면, 작가와 출판사가 어렵게 만들어낸 창작물이 초판이라는 시험무대를 통과하고 본격적으로 ‘팔리는 책’이 되었다는 뜻이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신작이 독자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출판사 입장에서는 가능성 있는 작가와 좋은 기획을 거쳐서 만든 책이 수익을 내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중판출래는 책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성공의 동의어로 그려진다.
 
최근 J.K. 롤링의 작품 해리포터 시리즈의 초판본에 대한 뉴스가 화제가 되었다. 영국에서 네 자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해리포터 시리즈의 1편인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초판본을 발견했는데, 유독 보관상태가 좋았던 이 책을 경매업체에서 약 1억 원 정도의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전 세계 판매량은 5억 부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대단한 성공의 시작이었던 시리즈 1편의 초판 부수는 단 500부였다. 우리나라 출판계에서도 보통 초판에 발행하는 부수가 장르나 작가의 인지도 등에 따라 500부, 1000부, 혹은 2000부 등으로 정해진다고 한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는 해리포터 시리즈 역시 첫 시작은 다른 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첫 작품을 써서 500부의 초판을 찍었던 J.K. 롤링의 간절한 마음이 1조 원이 넘는 거부가 된 현재의 그녀와 쉽게 겹쳐지지는 않는다.
 
독자의 입장에서 초판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인터넷 서점에서 사전 예약 주문을 할 수 있어서 초판 1쇄를 사기가 예전만큼 어렵지는 않지만, 여전히 원하는 책의 초판본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제법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이런 수고로움이 있더라도, 이제 막 출간된 책의 초판을  사는 것은 세상에 갓 태어난 책을 남보다 먼저 읽는다는 소소한 뽐내기이고, 어떤 서평의 영향을 받기 전에 온전히 나의 힘으로 책을 소화하고 평가할 기회를 갖고 싶다는 선량한 욕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을 출판한 작가에 대한 조건 없는 지지의 선언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초판 1쇄를 책꽂이에 꽂아두고 혼자서 뿌듯해하는 건 덕질이 주는 훈장이다.

e북의 판매량이 종이책을 훌쩍 넘어선 시대에 초판본이라는 말은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얼마나 팔릴지 모르는 책의 운명을 유능한 편집자가 면밀히 예측해서 너무 많지도 그렇다고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첫쇄를 찍는 일 자체가 종이책 시대의 유산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전자책의 세상에서 재고라는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인연이 묘하게 겹치면서  최근 즐겨 읽게 된 정지우 작가의 신간 <너는 나의 시절이다> (도서출판 포르체)가 출판되었다. 평소 SNS를 통해 독자들과 활발한 소통을 해온 그답게, 신작 출판의 감사함을 개인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렸는데,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서 출판 즉시 증쇄가 결정되었다는 기쁜 소식도 덧붙였다. 초판 중판이 아니라, 오래오래 읽힐 좋은 책이라서,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읽어 보기를 권하고 다. 참고로 난 초판 1쇄를 구했다.



작가의 이전글 아들의 나들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