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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뗌 Sep 12. 2015

화분

 해가 떠오를 시각이 지났건만 어둠은 미련스레 도시를 품은 채 갈 길을 잊었다. 바람이 길게 불었다. 잔 빗방울에 아스팔트 바닥이 짙게 물들었다. 번들대는 도시의 대지엔 노란 불빛이 흐리게 빛났다. 아늑하고 따뜻한 실내에서 보는 비에 젖은 도시는 애상적이지만, 비를 맞고 밖을 헤매어야 할 때는 그저 짜증과 원망의 대상이 될 뿐이다.

 

 앞서 불린 환자가 들어간지 30분이 훌쩍 넘었다. 대기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아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고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안경을 벗고 바라본 세상엔 형체도, 원근도, 부피도 없다. 그저 도화지에 직접 물감을 짜고 손가락으로 짓뭉개어 그린 그림처럼, 이곳 저곳에 온갖 알록달록한 색들이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그나마도  오늘처럼 어두운 날이면 색조차 사라진다. 그저 어둠과, 이곳 저곳에서 번지는 노랗고 하얗고 붉은 꽃 뿐이다. 세상이 단순해지는 만큼 마음은 아래로 아래로 꺼져든다.


  숨을 골랐다. 한없이 가라앉는 생각을 다른 쪽으로 전환하려 했지만, 붙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서울대 의대를 나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개인병원 원장이 된 여의사는 가면같은 미소를 줄곧 띠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얘기를 들었다. 중간에 책상밑으로 문자를 슬쩍 확인하기에 크흠 헛기침하며 눈치를 주었다. 그녀가 다시 문자를 확인하는 일은 없었다. 상담을 마치며 의사는 이걸로 삶이 드라마틱하게 개선될거라 기대하면 안된다고 했다. 문자확인해서 깎아먹은 점수가 거기서 좀 회복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곳을 찾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비는 그쳤으나 바닥은 아직 검었다. 검은 길을 자박자박 밟아 되돌아오며 떠올렸다. 15살때 홀로 걸었던 새벽 세시의 귀가길과 19살때 홀로 걸었던 새벽 두시의 학원가와 22살때 홀로 정처없이 걷던 새벽 네시의 한강길과 26살때 휘청이며 걷던 새벽 한시의 골목길들을. 그리고 앞으로도 홀로 헤메일 새벽의 골목들을.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나이. 여러 사람의 죽음을 보아왔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아파트 단지 안에서 이름모를 꼬마가 덤프트럭에 깔려 머리가 터져 즉사했다. 학교에는 몸 밖으로 튀어나온 뇌조각과 바닥을 흐르는 뇌수에 대한 목격담이 무용담으로 떠다녔다. 국민학교 6학년 때 같은 학년 아이가 투신자살했다. 부검결과 그 아이는 즉사하지 못하고, 떨어져서 사망할때까지 6시간이 걸렸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중학교때 같이 학원에 다니던 아이가 백혈병으로 죽었다. 엄마는 그애가 참 공부잘하고 똑똑했다고 아깝다고 했다. 대학때였다. 과 특성상 밤을새워 유해물질을 깎고 갈고 하는 일이 많았다. 몇해 전 선배 하나가 그것때문에 암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늘 머리의 한켠을 그들에게 내주고 산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다 어딜 간걸까. 똑똑,여보세요. 들리시나요. 거긴 좀 어때요?


 우주 얘기를 좋아했었다. 우주의 무한함이 좋았다. 나의 작고 개인적인 지옥은 그 안에서 티끌보다도 작고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깨달았다. 나의 작고 개인적인 지옥이 진정 무에 가깝도록 작아지려면, 우선 나 부터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게 아닌 한 모든게 그저 관념적인 도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심해에서 올라와 수면으로 숨구멍을 내미는 돌고래처럼 고개를 최대한 위로 빼고 숨을 들이마셨다. 숨을 내쉬며 간절한 눈길로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흐리죽죽한게 얼룩덜룩한 구름이 무성의하게 뒤엉켜있는 회색빛 하늘은 쳐다보지 않는 것만 못했다. 눈을 감고 손에 구겨쥔 전단지 모서리를 손끝에서 피가 나도록 비벼댔지만 조금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돌아온 집은 후덥지근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스위치를 올리자 창백한 형광등이 나갈 때와 똑같이 개판인 집안을 무미건조하게 비추었다.  어딘가에 앉으면 두번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열흘 가까이 무시하고 있던 된장찌개 냄비 앞에 드디어 가서 섰다.


 뚜껑을 여는 데는 각오가 필요했다. 그 안은 이미 별천지였다. 형체도, 원근도, 부피도 없이, 그저 도화지에 직접 물감을 짜고 손가락으로 짓뭉개어 그린 그림처럼, 아담한 뚝배기 가득 이곳 저곳에서 번져있는 초록색, 노란색, 보라색의 희끗희끗하고 얼룩덜룩한 생명들.




 나는 뚝배기 그릇을 통째로 들어 음식물 봉지에 부어버리려다 말고, 그대로 들어다 베란다 화분 곁에 가져다 둔다. 살 수 있겠거든 한번 재주껏 살아봐라. 나는 잘 모르겠으니.


 그날 밤에 꿈을 꾸었다. 몸이 희끗희끗하고 얼룩덜룩하고 질퍽질퍽한 아이가 잠자리로 다가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 꽃피운 세상의 이야기를 속삭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처럼 기묘하게 세상에 나타나는 자들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 이것 저것 더 물어보려 하였으나, 자기 할 말을 마친 그는 그만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그에게 물어볼 것을 잔뜩 품고 잠에 들었으나 그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두번째 화분은 아직도 그 자리에 놓여있다. 내용물은 희게 말라 비틀어진지 오래 되었으나, 나는 아직도 그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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