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뗌 Feb 15. 2023

여름 방학

그게 언제였더라. 학업과 주거, 우정과 앞날을 비롯한 모든 것이 한 학기 짜리 시한부로만 보였던 그 해 여름.

이천팔년이던가, 구년이던가. 혼란스럽게 덩어리진 채 가버린 시간들을 단정한 숫자로 헤아리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특히 몇몇 기억들은 보편적인 시간 단위와 잘 연결되지 않는다.

 그 밤, 계속되는 밤샘 작업에 지친 학생들은 여기 저기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좀 걸을까? 그래, 그러자. 잠든 A를 남겨두고 B와 C와 D는 신발을 꿰어 신었다. 밤 거리는 조용했고, 들려오는 것은 발꿈치 아래에서 질걱거리는 낡은 샌달 소리뿐이었다.

B는 규칙적으로 지걱, 지걱, 지걱, 하는소리를 멍하게 들으며 서서히 생각했다, 나는 이 여름을, 이밤을 영원히 못 잊어 버리겠지, 그래서 지금보다 더 외로워지겠지. 술기운에 겨워 말랑해진 마음은 쉽게도 벅차 올랐다. 울 준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망해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B는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지르며 목놓아 울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차라리 최대한 추하게 목놓아 울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목놓아울 수 없다면 지나가는 지렁이 새끼라도 질겅질겅 밟아 죽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민망해지는 것이 싫었던B는 결국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지렁이를 밟아 죽이기는커녕 돌멩이를 걷어차면서 분풀이를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넷이서 함께 한 마지막 밤도 결국엔 또 한 번의 억눌림으로만 남고 말았다.

 그들은 그 이후 단 한 번 술자리를 함께 했을 뿐이었다. 가장 먼저 떠난 것은 C였다. 셋중 가장 예의발랐던 C. 그는 아무리 가까운 관계더라도 늘 극도로 조심스러웠고, 그 반대 급부로 억눌린 마음을 폭발시키듯 난폭하게 운전을 하곤 했다. 그는 떠나기를 결정하자마자 마음도 함께 캐리어에 접어 넣은 사람처럼 산뜻하고 깔끔하게 가 버렸다.  A는 그런 식으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선택해버린 C를 간혹 떠올리며 세상의 모든 ‘깨끗’과 ‘산뜻’에 대해 끓어오르는 악감정을 느끼곤 했다.

C가 종이 자르듯이 떠나 갔다면, D는 서서히 사라졌다.그는 단순 반복적인 노동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공부를 할 수도 없고 뭔가 깊은 생각을 할 만한 짬도 없는 근무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리보 곰 젤리를 십 분에 한 개씩 먹는 게임을 했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젤리를 십 분 안에 한 개 이상 먹어버리면 그는 게임에서 지는 것이었다. 만일 그 날 여덟 시간의 근무 시간 동안 착실하게 십 분에 한 개씩의 젤리만을 먹었다면 그는 게임에서 이기는것이었다. 그는 그 게임을 아주 오랜 시간 끈기 있게 하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A와 B는 아직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만나서 시시껄렁한 얘기를 주고 받고 빛 바랜 액자처럼 낡아져버린 과거 얘기를 하고 또 하며 웃고 떠든 끝에 각자 헤어져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그 일을 신성한 의식처럼 주기적으로 치른다. 헤어져서 돌아오는 길에는 흔들리는 지하철에 몸을 실은 채 우리는 각기 얼마나 긴 시간을 건너왔는가를 생각하기도 하고, 예전의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한점의 의혹도 없이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노라 믿었던 것인지 자문하기도 한다.

 그들은 요즘도 가끔 만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골목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