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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뗌 Sep 01. 2015

어느 새벽


 심장이 시근거려 밤새 뒤척이다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빛없는 새벽, 거리는 아직 추웠다. 심장의 시근거림이 헐떡임으로  바뀔 때까지 쫓기듯 걷다 지쳤을 때, 24시간 맥도널드의 불빛을 보았다. 나는 떡진 머리와 늘어진 티셔츠를 신경 쓰며 종업원의 시선을 피해 2층 구석자리로 숨었다.

 맥도널드의 커피는 싸고 양이 적었다. 손이 비는 것이 불안해 내내 종이컵을  두 손으로 붙들고 있었으나, 몇 번 홀짝이자 손 안의 온기는 금세 줄어들었다. 짓눌린 내장이 뜨끈한 커피에 금세 눅진하니 풀어졌다. 얼마 안 되는 커피가 사라지고 나니 빈 손과 갈 곳 없는 눈과 텅 비어버린 뇌가 일 없이 산만해졌다. 뭐라도 끄적이자 해서 가방을 뒤졌지만 펜이 없었다. 대신 책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문학을 읽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책이 낯설었지만 그래도 읽었다. 행간이 터지도록 눌러 담은 작가의 절망과, 그 절망으로도 누를 수 없는 시퍼런 결기가 그 안에 있었다. 책을 잘못 들고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괴로워 계속 읽어내려갔다. 나는 그렇게 섬세하게 절망할 능력이 없는 자신의 둔함과 그 정도의 시퍼런 결기는 감히 품을 수도 없는 작은 그릇이 다행스러웠고 또 짜증스러웠다. 그리고 무엇을 보든 결국 '나'에 대한 상념으로 수렴하고야 마는 자의식 과잉에 생각이 미치자, 갈 곳 없는 짜증과 근거 없는 초조는 극에 달했다.

할 수만 있다면 뇌를 꺼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새벽녘 들이킨 한 잔의 카페인은 힘이 셌다. 나는 눅진하게 풀렸던 몸이 플라스틱 의자처럼 딱딱하게 굳어질 때까지, 소화할 수도 없는 타인의 절망과 극기를 지근지근 씹어 삼키길 멈추지 못했다. 고역스러웠으나, 관성을 깨고 자리를 뜨거나 책을 덮을 기력이 없었다.

 마침내 그만 갈까, 망설이는데 2층 플로어에 나이 든 남자가 대걸레를 들고 나타났다. 남자는 곧장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더니 어색하고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걸레질을 하려면 테이블을 좀 옮겨야 한다며 잠시 소란스럽게 해도 괜찮겠느냐 양해를 구했다. 나도 어색하고 상냥하게 그러시라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문득 봇물 터진 듯 중얼중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책을 많이 읽으면 좋지요, 특히 어릴 때 많이 읽어야 돼요, 고3, 고3 때 책을 읽어야지, 요즘 애들은 영 책을 안 읽는단 말이요, 학생이 책을 읽어야 되는데...

 댁에 자녀분이 고3 이신가 봐요, 한 마디쯤 건네고 싶었지만, 눈으로 읽은 글이 목구멍에 가서 쑤셔 박혔는 지 네, 소리 조차 나지를 않았다. 대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미소로 답했지만, 채 5분도 지나기 전에 점점 볼 근육이 당기면서 모든 것이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바닥을 훔치면서도 내 얼굴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그 성의 없는 응답에 힘을 얻는  듯했으나, 내 미소가 어색해지면서 그도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2층 플로어 전체가 다시 정적에 가라앉았고, 내 시선은 다시 책의 종이 위로 못 박혔다. 나는 그가 자리를 떠나기를 곁눈질하며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잽싸게 책을 가방에 던져 넣고 도둑처럼 슬그머니 맥도널드를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동이 트기 시작했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침대에 누워 잠시 뒤척였으나 역시 잠이 오지 않았다. 커피로 씻어낸 빈 속이 뒤늦게 쓰렸다.
 부엌으로 가 불을 켜자 전전날 불고기를 볶아먹은 프라이팬이 싱크대에 처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수돗물을 붓자, 먹고 남은 불고기 양념이 먼지처럼 피었다가 가라앉았다. 맑은 물 아래 검은 바닥에 뭉실뭉실 뭉쳐있는 불고기 먼지가 수몰된 폐허로 보였다.


 나는 남은 설거지를 후딱 해치우고, 별로 닦을 것도 없는 싱크대에 세정제를 양껏 뿌려가며 힘주어 문질러 닦았다. 음식물 쓰레기를 봉투에 옮겨 담아 한손에 달랑달랑 들고 나갈 무렵엔 해가 완연히 떠올랐고, 그제야 유예되었던 졸음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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