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뗌 Sep 10. 2015

맥주 한잔


시작과 끝을 다 알고 있는 영화를 틀어놓고 맥주를 마신다. 특별한 체질을 타고 나지 않은 이상 술은 마시는만큼 는다.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기도 전에 이미 얼굴이 얼얼하다. 혀가 뻣뻣하고 두피가 오싹하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나는 알콜에 중독된 사람들-언제나 이 시간대에서 살기를 택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특별한 흐름은 아니다. 나는 운동을 할 때면 운동에 중독된 사람들을 생각하고, 술을 마시면 술에 중독된 사람들을 생각하고, 병원에 갈때면 뮌하우젠 신드롬에 걸린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영화는 온통 잿빛이다. 상실, 상실에 대한 이야기. 선택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익숙한 이야기라서 골랐다. 감자칩을 마구 집어먹었더니 입이 짜다. 초콜렛을 꺼내 한알 으적으적 씹는다. 더운 날에 녹았다 굳은 초콜릿이 저들끼리 멋대로 늘어붙어있다. 하나씩 뚝뚝 부러뜨려 근면하게 씹는다.




 나는 뭔가를 죽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주말 오후, 홀로 컴퓨터 앞에 앉아 감자칩에 초콜렛에 맥주를 미친사람처럼 목구멍 너머로 꾸역꾸역 넘기느니, 차라리 뭔가를 죽였어야 한다. 하다 못해 비내리는날 기어나온 지렁이라도 운동화 뒷축으로 꾹꾹 눌러 곤죽을 만들었어야 했다.


 문득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40분 전에 온 메시지가 미확인 상태다. 시간이 확실히 다르게 흐르고 있다. 대충 누가 들어도 좋을 말을 아무렇게나 적어 답장을 보낸다. 몇번 메시지가 오가다가 적당히 마무리된다.






두번째 캔을 딴다. 이제 감자칩이 골판지처럼 느껴진다.


이해라는 것은 어두운 시골길을 달리는 자동차의 희미한 불빛과 비슷하다. 정말로 필요한 만큼조차 명료하게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간신히 익숙해졌다 싶으면 예기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나 주행중인 차 자체를 위협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 한심하고 가여운 불빛에 모든 것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아니면 어둠을 긍정하고 그 안에 머무를수도 있지만...어떤 인간이 감히 그럴 수 있나?


 감자칩이 줄어드는 속도가 현격히 줄어들어있다. 짜고, 뻣뻣하다. 혓바닥에 남은 짠기를 씻어내리기 위해 남은 맥주를 털어넣는다.


 비척비척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엉덩이를 까고 변기에 앉아 고통받는 방광이 제 할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고, 남아있는 뇌의 일부를 활용해 화장실에 들어온 후에 엉덩이를 깠는지 그 전에 깠는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돌아와 앉은 자리에 맥주캔은 모두 비어있고, 하늘이 검다. 한 캔을 더 비웠는데도 여전히 검다.        


   


매거진의 이전글 화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