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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Jun 06. 2021

그러니까 못살고 이혼했지

이혼 후 이야기 #. 57




남편과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을 때가 32살 때였다.



십 년이 흘렀다.



참 무더웠던

십 년 전 여름과 열 번의 겨울,

그리고

열 번의 생일 케이크 초를 훅 불어 끈 병아리 같던 아이들이 솜털을 깃털로 갈아치우며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나의 10년 뒤'는커녕 

내년도 상상할 수 없던 막막하고 뼛속이 춥던 시간들을 보냈다.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한다고 하는 게 겠지만

아이들의 여리고 작고 가냘픈 손이 또다시 내 손안에 쥐어다면


나는 기꺼이 찬바람을 정면으로 맞서며 그 시절을 반복해서 겪어낼 자신이 있다.


다만 어느 글에서처럼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나의 불규칙하고 급하고 불안하던 호을 토닥이며

숨을 좀 고르라고

멀리 보라고


결국엔

넌 잘할 거라고

미리 좀 어깨를 투닥거려주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남편]없이 2, 3년에 한 번꼴로 다녔던 이사는 낯선 환경에서의 적응과 짐 정리에 몸살을 앓는 나의 몸보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자인 게 티가 날까.'

'아빠가 없는 아이들로 보이는 건 아닐까.'

를 극도로 염려했던 내 마음을 더 상하게 했다.




아이들이 어렸던 그때 큰 맘먹고 동네에 몇 집 안 되는 갈빗집에 데리고 갔던 적이 있었다.


태우지 않고 한 점이라도 더 먹이려고 정신없이 고기를 구워 아이들 접시에 놓아주는데, 대각선 건너편 식탁에 앉아있던 남자 손님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걸 어느 순간 느꼈다.


술이 얼근하게 취한 듯한 나이 든 손님의 다소 끈적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아이들에게 더 말을 시켰다.


그 사람은 우리 아이들이 한부모 가정인지, 내가 남편 없이 사는 여자인지 알았을까.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를 힘들게 한 건

'남편까지 4명의 가족이었다면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쳐다볼 수 있었을까?'

라는 자격지심에서 스스로 불러온 불쾌함이었다.


내 이마에 이혼녀라는 글씨가 쓰여있었던 것도 아닌데 혼자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손아귀가 아프도록 집게를 잡으며

고기를 굽는데...

불현듯 무섭고 서러웠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 귀에 들리는 듯했다.


여자 혼자 아이 키우나 봐
남편이 없나 봐
과부인가?


난 왜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왜 그렇게 매사를 불안에 떨며 보냈을까.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혼가정, 편부모 조부모 가정, 다문화 가정...


사회적 인식들이 이들에 대해 많이 관대(?)해졌고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과연 나는 달라졌다는 그런 인식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덜 불안하거나 마음이 편안해졌을까.



남편분과 상의해보시고
연락 주세요 사모님

여전히 나는 집안에서 가장 결정권이 크다는'남편'이란 존재가 있을 거라는

아니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남들에게 정의되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아직 우리나라에서

"남편 없는데요? 저 이혼했는데요?"

라고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되는 내 개인정보(?)와 가족 구성원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줄 수 있을까.



소송을 불사했던 이혼 과정과 지금까지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난 여전히 그때의 결정이 옳았음을 확신하고 삶의 만족도도 높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이혼가정은 생김새가 약간 다른 혼혈가족이나 외국인 가족을 보듯 다소 신기하거나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대상임을 느낀다.




십여 년 전

주차전쟁이었던 다가구 전셋집에 살 때

내 차를 주차하지 말라는 아랫집 아저씨와 싸우지 않은 것도


쓰레기 더미를 뒤져 남자 신발을 한 켤레 주워와서 문 앞에 보란 듯이 놓아둔 것도


큰 가전제품을 사거나 부동산 거래를 할 때 "남편과 상의 좀 해보고요."라고 당시의 상황을 모면한 것도


어쩌면 그것이 알게 모르게 내 처지를 자연스럽게 위장하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과 상의해보겠다는 말은 곤란한 상황을 보기 좋게 마무리하는 딱 좋은 신의 한 수 같은 멘트인걸 보면 말이다.



친했던 학교 친구에게 부모의 이혼을 말할 수 없었던 딸이 어느 날 그 친구도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고백을 듣는 순간 급속도로 더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기뻐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었다.


그 친구나 내 딸이나 자신의 집안 사정을, 아빠의 부재를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면서 얼마나 불편했을까.


여리고 민감한 사춘기 딸들에게 부모의 이혼과 과정들은

학교에서는 <평범한 가면>을 만들어 쓰고 다니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기소개를 하면 초면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묻게 되는

"남편은 뭐하는 분이세요?"라는 질문이나


혹은


소문에 이혼했다던데 사실이냐고

오늘 날씨를 묻듯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지는

상대방에게 배려라고는 없는 내 직장 선배의 무례함을 그때그때 지적하지 못하는 걸 보면 여전히 나는 가면을 벗기가 두려운가 보다.


이혼이 내게 플러스가 되지 않는다는 걸 상대방의 표정에서 언뜻 스쳐가는 느낌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혼 후 친구 부부와 동석하는 것이 불편할 때가 많아졌다.

그들 앞에서 '내가 하고 있지 않은, 하지 못한' 결혼 생활의 행복을 빌어주기도,


그렇다고 기분을 맞춰주고자 남편 흉을 보는 친구의 농담을 거들기도 어색하기 때문이다.





옆 부서의 아무개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동료에게

"왜 이혼했대요?"라고 궁금해서 물었다가


풉!
이혼한 사람들이 왜 이혼했는지 어떻게 알겠어.
부부일인데.

나의 이혼을 알고 있는 그가 흘리는 미소를 묘한 비웃음으로 읽은 건 순전히 내 느낌 탓일까...


이혼한 여자는 무슨 죄가 있길래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도 안되며 질문하는 것을 망설여야 할까.



너 이혼했냐고 다짜고짜 초면에 묻던 직장선배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입사동기들이 다 이혼했고 그중에 나만 이혼 안 했어~ 짜식들, 잘 좀 하지들. 하하하"


나는 이혼했으니 그 말을 나더러 들으라는 거냐고 발끈해야 할지 아니면 나는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템포를 맞춰 같이 웃어줘야 하는지 여전히 곤혹스럽다.


이런 순간순간의 찰나에도 움찔하게 되는 걸 보면

대한민국에서 이혼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면 몇 개 정도는 수시로 바꿔 쓸 수 있는 멘털이 되어야 하는가 보다.



이혼한 나와는 다르게

아직 이혼하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선배를 보면서, 소심한 복수로 그 와이프가 부처님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세요? 아내분이 보살이네요. 나라면 당신 같은 사람과는 못 살 건데 말이죠...'


그럼 또 이렇게 생각할까?


그러니 못살고 이혼했지

그래 맞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부부로 묶여있다는 사실만으로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신경 쓰여서

혹은 재산을 나누기 싫어서

혹은 억지로 해야 하는 부모역할 때문에


서로를 서서히 죽이는 결혼생활을 하느니

갈라서서 각자 열심히 사는 것이 언제 끝내게 될지 모르는 유한한 삶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싶다.




...

나는 견디는 힘이 약했을까

그래서 남들이 참고 유지한다는 힘든 결혼생활을 더 버티지 못하고 놓아버린 걸까.




상관없다.


남들에게 '인내심이 강하다'는 평가로 위안삼아 살 것도 아니고

불편하긴 해도 (상상 속 인물처럼) 가끔은 남편이 있는 척하기도 하면 어떤가.




이혼이 정답은 아니지만

이혼하고 나니

십 년을 이혼녀로 살아보니

보인다.


비정규직

32살에 자식들 데리고 홀로서기를 하고

비참해하고 울고 조바심도 내고 억울해도 하며

수많은 밤들을 고민하고 흘려보내고

내 손으로 그 아이들을 키우고

내 힘으로 돈을 모으고 보금자리를 구하고 보니

보인다.



무엇이 소중했는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제 내가 다음으로 할 일이 무엇인지

순서가 보인다.



생각보다 단단한 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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